[홍찬식 칼럼]
프로야구는 公正하다
오랜만에 가본 프로야구 경기장의 풍경은 과거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확 바뀌어 있었다. 관중이 크게 늘었다. 응원 열기도 뜨거웠다. 관중은 20, 30대가 대부분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는 어린아이부터 노년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관전하지만 한국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룰’ ‘실력 경쟁’ ‘관중의 눈’ 삼박자
올해 프로야구는 처음으로 600만 명 관중 돌파라는 신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프로야구 관중은 2008년부터 급증했다. 2004년만 해도 연간 233만 명에 그쳤으나 2008년 525만 명, 2009년 592만 명을 기록했다. 프로야구의 ‘빅뱅’에 따라 TV는 물론이고 네이버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도 프로야구의 모든 경기를 생중계로 전하고 있다. 야구 열기는 스포츠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젊은 세대는 유명 정치인의 뉴스보다도 프로야구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관심을 갖는다. 네이버에서 프로야구 뉴스의 페이지뷰는 정치 뉴스보다 5, 6배나 많다.
야구를 볼 때마다 우리 사회도 프로야구만큼만 투명하고 공정했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야구장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과 통계로 집약된다. 시즌이 끝나면 타자들이 몇 차례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몇 개 쳤는지, 투수들은 상대 팀 타선을 얼마나 잘 막았는지, 각종 성적이 데이터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팀 기여도를 매기기 위한 평가도 이뤄진다. 같은 안타를 쳤더라도 승부를 뒤집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높은 점수가 매겨진다. 이런 평가 항목이 구단마다 최대 100여 개에 이른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구단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정착시켜 놓은 것이다. 선수와 구단은 이 데이터를 놓고 연봉 협상을 한다. 공직 사회의 무사안일 풍토,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일부 분야에서 평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평가 기준이 분명하다 보니 신인 선수 선발도 투명하게 이뤄진다. 대학의 특기생 입학 때 자주 논란이 됐던 ‘끼워 넣기 입학’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선수들이 프로야구에 들어올 때 받은 계약금 순서대로 야구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큰 기대를 안 걸었던 선수들 가운데 스타 선수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살벌한 경쟁 체제이지만 그 안에서 역전, 재역전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게 프로야구의 또 다른 매력이다.
지역 갈등은 프로야구에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대구를 연고지로 하고 있는 삼성 라이온스에 호남 출신인 선동열 감독이 지휘봉을 쥐고 있고, 광주의 KIA 타이거스는 영남 출신의 조범현 감독이 맡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 쉽게 알 수 있다.
특혜 채용에 들끓는 젊은 세대
프로야구의 투명성 공정성은 몇 가지 조건에서 출발하고 있다. 야구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룰이 존재한다. 승리가 돈으로 직결되는 프로스포츠의 속성상 구단 운영자들은 선수와 지도자들의 실력을 최우선 순위에 놓는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해서, 잘 아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서 못하는 선수를 계속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다. 더구나 심판과 관중의 눈이 지켜보고 있다.
이것이 프로야구만의 특수한 상황이어서 다른 분야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혜 채용 때 내부 심사위원들은 특혜 대상자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몰아줬다. 장관 딸이 응시했다면 내부 심사위원은 심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요즘 예술 분야 콩쿠르만 보더라도 자기 제자가 출전하면 해당 심사위원은 채점에서 제외된다. 평가점수 가운데 최고점수와 최저점수는 배제하는 방식도 일반화해 있다. 이런 합리적 룰만 제대로 지켜도 특혜 시비는 줄어들 수 있다. 모든 조직에 프로의식이 있다면 실력 경쟁은 기본이다. 프로야구에서처럼 실력 위주의 풍토가 정착되고 모든 실적이 구체적 수치로서 확연히 드러난다면 지연 학연은 서서히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공직 사회를 감시하는 눈이 많아질수록 공정은 살아난다.
프로야구에도 그늘은 있다. 구단의 횡포가 여전히 존재하고 선수 권리가 침해당하기도 한다. 한 명의 스타 뒤에서 수많은 경쟁 탈락자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프로야구는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공정한 곳이다. 심판의 판정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이튿날 팬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감독의 선수 기용이 어설프면 바로 공격을 받는다.
이런 엄격한 기준이 몸에 익은 젊은 세대들이 정치인과 공직자, 사회지도층의 끼리끼리 특혜와 도덕적 해이를 보면서 느끼는 분노는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공정 사회’와 ‘지도층 불신’의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 정치는 어디 먼 곳으로 가 배울 필요가 없다. 이번 주말 가까운 야구장에 가보면 더 잘 보일지 모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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