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성지

대전교구 내포지역 도보순례

namsarang 2010. 9. 13. 18:10

[즐거운 여가 건강한 신앙/순교자성월특집]

 

대전교구 내포지역 도보순례


순례길 전체가 신앙 터전ㆍ순교 현장
 
▲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합덕성당. 양옆으로 소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계단을 오르니 천국의 계단이 이럴까 싶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일기예보를 살피니 충남 지역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 비를 맞으면서 도보성지순례를 한다는 게 별로 달갑지 않다. 한 주간 날씨를 검색해 보니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폭우가 쏟아진다는 일기예보다. 비를 조금 맞더라도 오늘 일정을 강행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내포(內浦)지역을 순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무작정 지도를 들고 찾아가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나 초행길이라 헤맬 수도 있으니 알려진 순례코스를 따라가기로 한다.
 대전교구 여사울성지에서 신리성지ㆍ합덕성당을 거쳐 솔뫼성지까지 약 15.5km 여정이다. 성지와 성지를 연결해 놓은 여느 도보순례 코스와 달리 순례길 전체가 신앙의 터전이자 순교 현장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첫머리에 내포교회가 있다. 내포는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과 무한천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을 일컫는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이 세례를 받고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를 전파하면서 교세가 크게 번창했고,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산종합터미널에서 신종리 방향 버스를 타고 신종1리 경로회관에 하차, 3분 정도 걸어가니 이존창 사도 생가인 여사울성지 이정표가 보인다. 여사울은 내포교회 중심이자 신앙의 고향이기도 하다.
▲ 여사울성지 이존창 사도 유적비

 이존창 사도 유적비 앞에 섰다.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 차례 배교의 아픔을 겪는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주님을 향해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자책감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던 그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 이후 삶은 잘못을 뼈저리게 참회하는 만큼 치열했다. 고향에 내려와 전교에 온힘을 기울였고, 배교자 밀고로 다시 옥살이를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43살 나이로 참수됐다고 한다.
▲ 여사울성지 십자가의 길

 언덕 위 십자가 밑을 돌아내려와 성모상 앞을 지나자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언덕 아래 보도블록을 깐 길이 정성스럽다. 하얀 돌을 다듬어 세운 십자가의 길, 제1처를 지난다. 배교와 순교로 이어지는 이존창 사도의 삶을 생각한다. 그가 껴안아야 했을 고통, 스스로 저지른 배교의 나약함에 대한 처절한 자책, 그것은 차라리 죽음에 가깝지 않았을까. 피의 순교를 했으나 '하느님의 종' 124위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성지 성당 입구에 비치된 도보성지순례 안내도를 들고 본격적인 순례에 나선다. 길목마다 작은 이정표가 있어 헤매지는 않을 듯싶다. 이정표 속 물고기 문양이 가리키는 대로 발걸음을 내딛으면 된다.

 안내도에 표시된 길은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아닌 비포장에 좁고 구불구불한 농로다. 어릴 적 추억이 묻어 있는 고향길 같다. 빗길을 걸으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논두렁을 끼고 걷던 길은 잠시 도로 위로 이어졌다가 삽교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당진군' 이정표 앞에서 다시 제방길로 연결된다.
 빗방울이 굵어진다. 우산을 쓰려다 접어 넣고 그냥 걷는다. 비는 피할 수 있지만 바람의 저항 탓에 걸음을 내딛기 어렵다. 제방 왼쪽으로 삽교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벼가 익어가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다.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둥지를 틀고 있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평화롭고 아름답다.
 한참을 걸어도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안내도에 표시된 ⑥번 지점에서 제방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냥 지나쳤나 보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⑥번 지점을 찾았으나 안내도에 분명히 있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카타콤바'라 일컫는 신리성지는 지도와 이정표만으로 찾아가기는 어렵다. 한참 헤맨 끝에 소담한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큰 성전이 눈에 들어온다. 넓고 광활한 내포평야에서 풍요롭게 살던 신리공동체는 천주교를 믿는 바람에 몰살당한 마을이다. 신리공동체의 슬픈 역사가 바람결에 전해져 내려온다.
▲ 손자선 성인 생가를 복원한 초가 뒤편에 다블뤼 주교 동상이 서 있다.

 기념성전 옆으로 손자선(토마스) 성인 생가를 복원한 초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성 다블뤼 주교가 머물던 주교관이다. 초가 뒤편에 다블뤼 주교 동상이 서 있다. 자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손발이 터지는 고초를 감내했던 신자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착한 목자였다.
 성지 뒤편으로 쭉 뻗은 농로를 따라 다시 길을 나선다. 다블뤼 주교가 상복을 입고 방립(方笠)을 쓰고 신자들을 찾아 나섰던 그 길을 걷는다. 다블뤼 주교 체포 소식을 듣고 자수하러 나선 오메트르 신부 순교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길 곳곳에는 "주님의 뜻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의 피를 흘린 그런 신앙 선조들 자취가 배어 있는 듯하다.
 합덕에서 신례원으로 향하는 32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머리에 이고 굴다리를 지난다. 여기부터는 차들이 가끔 다니는 도로여서 길 왼쪽으로 걷는다. 비바람 탓에 대로변으로 분주히 차들만 제 갈 길을 달릴 뿐 인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외로울 때까지 걸어야 영감이 떠오른다'는 선배의 격려 문자메시지가 마음을 추스르게 한다. 다행히 합덕 인근에 들어서니 빗줄기가 잦아든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합덕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 자애로운 성모상이 반겨준다. 양옆으로 소나무가 늘어선 아름다운 계단을 오르니 천국의 계단이 이럴까 싶다. 성 황석두(루카) 순교비와 성직자 묘소가 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희생과 사랑으로 지켜낸 성당이다. 성인 유해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합덕성당을 나와 길을 건너면 부여식당이 보인다. 식당 오른쪽 골목으로 진입해 농로를 따라가다 신촌리회관과 합덕2양수장을 지나면 70번 지방도를 만난다. 도로를 건너 다시 좁은 길로 들어서 걸으니 왼편에 400년 된 팽나무가 육중한 몸매를 뽐낸다. 나무 아래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냥 더딘 걸음을 재촉한다. 가도 가도 막막하던 그 길은 들판 너머 한국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가 눈에 들어오면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 솔뫼성지 김대건 성인 생가. ㄱ자 형태 팔작지붕에 양반가 전통가옥으로 세워진 생가에서는 성인의 체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초록으로 물결 치는 솔뫼에 접어들자 성 김대건 신부 숨결이 금세라도 느껴질 듯 생생하다. 성지 입구에 들어서니 김대건 신부 생가와 수령 200년은 족히 넘었을 육송과 적송이 우거진 동산이 보인다.
 예의 소나무 숲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자세가 곧바르지 않고 휘어 자란 노송은 김대건 신부와 성인의 부친, 조부, 증조부까지 4대가 순교한 애처로운 순교사를 증언이라도 하듯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뒤튼다. 구석구석 성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순례 마지막 길에 오르니 더없이 좋다. 노송 아래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자비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순례자를 정겨운 시선으로 맞는 솔뫼 성모상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조아린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순교자들의 한결같은 신앙을 닮지 못한 부끄러운 뉘우침을 기도로 봉헌하며 마음 속 촛불 하나를 밝힌다.
서영호 기자 amotu@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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