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한옥의 재발견]<4>
김영섭의 경기 파주 운정성당
마음의 등불처럼… 마을을 비추는 성소
공간을 구성한 양식으로 따진다면 경기 파주시 운정성당은 ‘한옥’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마당부터 안채까지 느릿느릿 걸으면서 경험하는 공간은 어느 한옥보다 고즈넉하다. 이 성당은 평생 한옥에서 살아온 건축가가 지어낸 처마와 대청 없는 한옥이다. 사진 제공 성균건축도시설계원 |
지난달 28일 해질녘 찾아간 경기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운정성당은 불 밝힌 연등처럼 동쪽에 면한 8m 너비의 마을 앞길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검정 기와를 차곡차곡 얹어 야트막히 올린 지붕에 슬쩍 추어올린 처마곡선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첫눈에 이 건물은 딱 ‘한옥’이다. 옹이 엉긴 나무 기둥이나 기지개 켜듯 뒤틀린 널마루는 보이지 않아도, 철근콘크리트 구조 안채와 철제 컨테이너박스로 만든 바깥채 사이 마당에는 한옥 대청에서 대문 사이를 걸으며 경험하는 점이(漸移) 공간의 개방감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설계자인 김영섭 성균관대 건축도시설계원 교수(60)는 “한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추녀의 곡선이나 나무 기둥, 들보의 구조 같은 형태 이전에 선조들이 공간을 통해서
“건물 밖 공간을 내부에서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한옥 공간은 어둑한 듯 밝으며 좁은 듯 넓다. 장지문을 젖히면 담 너머 정경이 마당과 집 안으로 밀려들어와 공간을 확장한다.”
검은색 기와는 본디 낮게 지은 2층 건물을 한층 더 낮아 보이도록 만든다. 붉은 기와로 채워 넣은 여느 성당 지붕과는 다르다. 김 교수는 “색이야 어떻든 기와의 재료는 똑같은 흙이다. 우리 조상들이 예쁘고 단단한 붉은 기와 굽는 방법을 몰라서 못 만들었겠느냐”고 했다.
햇살 품는 동쪽 통유리창, 안채-바깥채 사이 마당, 한옥의 개방감 그대로 살려
운정성당 미사실은 넉넉하지 못했던 용지 조건을 널찍한 채광창으로 해결했다. 밤마다 이 창은 가로등 대신 마을을 밝혔던 한옥 창호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진 제공 성균건축도시설계원 |
“검은 기와는 붉은 기와보다 쉽게 부스러진다. 밀도가 낮아 잡초가 뿌리박고 자라기도 쉽다. 어느 쪽이 보기에 좋을지는 고민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어떤 기와가 그것으로 덮인 공간에 사는 사람을 더 잘 숨쉬게 할까. 검은 빛깔은 밝은 양기(陽氣)를 받아들여 품는 공간의 성격도 보여준다.”
건축을 시작할 때부터 김 교수가 한옥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22년 전 서울 서초구 아파트를 팔아 1928년에 지은 종로구 계동 한옥으로 이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도 그저 고향인 전남 목포시 북교동 한옥에서 자신이 얻었던 ‘마당 깊은 집에 대한 추억’을 세 아이에게 선사해 주려 했을 뿐이다.
“전통가옥에서 배울 것은 추녀-들보 등의 구조보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지혜”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몸을 낮춰야 머리 찧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뻑뻑한 문을 억지로 당기면 더 열리지 않는다는 것, 벽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이웃 공간의 사람도 배려해야 한다는 것, 때로 비움이 채움보다 아름답다는 것. 한옥 덕에 자식들 모두 별로 잘난 것 없지만 예절 바른 사람으로 성장해 줬다.”
대구지방법원 판사인 둘째 딸은 김 교수에게 자주 “한옥에서 살게 해줘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한옥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김 교수의 자식들뿐이 아니다. 동년배 다른 건축가들과 비슷하게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김 교수 역시 재료의 본성과 주변 공간의 여건에 더 주목하게 됐다. 수원 화성(華城)의 벽체와 한옥 대청을 차용한 부산 서대신동 주택(1992년)을 기점으로 내부 공간의 소통을 강조한 서울 삼청동 주택(1997년), 뒷산 정자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은 충남 청양성당(1999년) 등이 이어졌다.
“목재 한옥은 튼튼하지 않다고 여기기 쉽지만 강원 강릉시 오죽헌(烏竹軒) 같은 한옥은 지은 지 450년을 넘겼다. 콘크리트 건물이 그렇게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있을까. 건물은 버틸지 몰라도 그 안의 사람이 버틸 수 없을 거다.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재료로 만든 공간, 그게 내가 한옥으로부터 얻은 가르침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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