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
마에하라 세이지와 박지원
2006년 3월 31일 당시 일본 제1야당이던 민주당의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현 외상)가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본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다. 당 소속 나가타 히사야스 의원이 폭로한 한 통의 이메일이 화근이었다. 주가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호리에 다카후미 전 라이브도어 사장이 회사 직원에게 ‘다케베 쓰토무 자민당 간사장의 차남 앞으로 3000만 엔을 송금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전직 기자를 통해 메일 사본을 손에 넣은 나가타 의원은 그해 2월 1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를 공개했다. 마에하라 대표는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며 집권 자민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몰아붙였다. 그런데 폭로 직후부터 메일이 가짜라는 증거가 하나둘 나왔다. 나가타 의원은 폭로 12일 뒤 국회에서 사죄 기자회견을 했다. 가짜 이메일 소동은 결국 마에하라 대표의 사퇴로 막을 내렸다.
지난달 19일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지난해 5월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이명박 정부는 왜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하느냐’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공식 부인했지만 박 원내대표는 1일 “그것(공식 부인)은 외교수사이지 팩트(fact)는 아니다”라고 다시 들고 나왔다. 자신의 지난달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가 “확인 결과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이미 밝힌 상황에서 박 원내대표가 거듭 자신의 발언이 맞는다고 한 것은 결코 모른 척 넘길 수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사실상 내정된 시진핑과 중국 외교부가 실제로는 말을 해놓고도 외교적으로 난처해지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면담 내용을 기록한 주중(駐中) 대사관 면담요록과 김 전 대통령 측 면담록에도 그런 내용이 없고, 신정승 당시 주중 대사를 비롯한 정부 측 배석자들도 그런 언급이 없었다고 부인했지만, 박 원내대표는 모두 무시하고 있다.
국익에 미칠 수 있는 영향 측면에서도 그의 발언은 나가타 의원의 폭로보다 악성(惡性)이다. 그의 말대로 중국 지도자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국(한국) 정부를 실제로 ‘평화 훼방꾼’ 수준으로 평가했다면 한중 관계는 그야말로 위기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 원내대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요, 사실이 아니라면 박 원내대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양국 정부를 농락한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사퇴 이유가 된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난달 발언 때와 달리 이번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아니면 박 원내대표에게 계속 각을 세워서는 득 될 게 없다는 비겁함과 패배주의 탓인지도 모르겠다. 예산안 처리 등 의정(議政)에서 박 원내대표의 협조를 얻어야 편하다는 여권(與圈)의 편의주의가 작용할 수도 있다.
박 원내대표는 여권의 이런 허약함을 읽고 판을 흔드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을 것도 같다. 그가 검찰 수사 등에서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방어를 위한 공격을 한다는 해석도 일각에서는 나온다. 아무튼 박 원내대표를 상대하기가 힘겨운 듯한 덩치 큰 여권이 안쓰럽다. 60% 안팎의 의석을 갖고도 모진 상대 하나 다루지 못하는 것 역시 여권의 웰빙 체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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