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인정되기까지
'무염시태'로 불렸던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의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에 의해 선포됐다. 이 교의는 교회의 오랜 역사 안에서 논쟁이 됐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와 동정녀라는 것도 일찍이 선포됐지만 성모님의 죄없는 잉태는 1850년대까지 미뤄진 부분이다.
성모님이 죄없이 잉태됐다고 하는 것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초기 교부들도, 성경의 관심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데 성모 마리아의 역할과 성덕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교부들은 성모 마리아의 성덕을 찾아낸다.
초창기 유스니토 교부는 처음으로 하와의 불순명이 성모 마리아의 순명으로 극복되는 부분을 강조한다. 이레네오 교부는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구속자, 공동 중재자라고까지 설명하기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모님의 원죄없는 잉태에 대해 주저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등 중세기 대학자 성인들도 그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 신학자는 "성모님이 원죄없이 잉태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구원 중재 능력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다는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원죄로부터 면제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결코 한순간도 원죄의 지배하에 있지 않게 하실 수 있다. 둘째, 마리아를 어느 한순간만 원죄의 지배하에 있게 하실 수 있다. 셋째, 어느 시기가 지난 다음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이 세 가지 가능성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시겠는가 질문하고,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마리아에게 이루셨음을 확신한다. 당시 유명한 중세기의 공식이 있다. "하느님은 하실 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하셨다"(Potuit, voluit, fecit)는 것이다.
교도권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회칙을 반포해 더 이상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해 논쟁하거나 서로 단죄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사회적 분위기는 신학적 논쟁과 달리 성모 신심이 가열되고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종교 개혁자들은 가톨릭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톨릭의 대중적 경향을 비판했으며,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마리아의 승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 지성주의와 계몽주의는 반작용을 낳았고, 가톨릭의 대중신심은 신비주의 경향에 더 매력을 느낀다. 성모신심을 중심으로 많은 단체와 수도회가 생겨난다. 1841년 8월 22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가 한국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된다.
그리스도교 국가의 왕과 주교들은 교황에게 빈번히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교의로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한다. 1667년부터 1799년까지 교황 13명은 선대 교황의 입장을 따라 중립을 지킨다. 성모 축일을 장려하면서도 신앙 교의로 선포하지는 않았다. 1840년 10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공동 서한으로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교의 선포를 청원한다.
마리아 신심이 깊었던 비오 9세가 1846년 교황이 된다. 그도 끊임없이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의 선포를 요청받았다. 교황은 주교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호의적인 답을 얻었고, 1854년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선포했다. 36항으로 구성된 회칙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탁월한 위치에 있음을 설명하고,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소개한다. 또 선대 교황들이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 신심을 격려했던 사실을 열거했다.
정리=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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