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이야기

(24)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namsarang 2010. 10. 23. 21:54

[조규만 주교 성모님 이야기]

 

(24)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성모 동정성, 하느님 신비 능력 드러내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신적 모성, 무죄한 잉태, 성모승천 등 네 가지 교리를 이번 주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살핀다. 구약성경에서 처녀성이나 동정은 불임성과 관련돼 축복보다는 저주나 불명예, 굴욕적인 것이었다. 야곱의 아내 라헬(창세 29,31)의 경우가 그 예다. 또 길앗 사람 입타의 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처녀로 죽는 일은 굉장히 슬픈 일(판관 11,37)이었다.

 그러나 동정은 혼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요성을 지녔다. 이삭의 아내 레베카(창세 24,16)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처녀나 불임녀는 하느님의 선택, 하느님 능력의 놀라움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예레미야나 유딧, 드보라는 종교적 동기에서 동정을 지켰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두고 처녀라고 불렀다. 신약에서도 동정은 혼인과 연결돼 있고,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처녀라고 표현했다. 또 동정성은 그리스도와의 혼인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동정성의 교회적 의미는 성모 마리아에서 절정에 이른다. 결국 성모의 동정성은 구약시대에 저주였던 것이 축복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동정을 보존하면서도 하느님 아들을 탄생시킨 성모의 동정성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렵기에 오히려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동정으로 살아간 바오로 사도는 될 수만 있다면 사람들에게 동정으로 살아가기를 권했다(1코린 7,32-35). 오로지 하느님께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교회는 성모의 동정성에 대해 네 가지를 강조한다. △신체적 온전함을 보존했으며 △예수님 탄생 이전, 이후 성 요셉과 성적 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었으며 △전적인 봉헌은 하느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모의 자발적 의지에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제 문제의 관건은 예수님 출생이 남자와의 성적 관계 없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느냐, 그 출생이 어떻게 마리아의 신체적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우선 교회는 성서적 근거로 '젊은 여인'(이사 7,14)이라는 단어를 '동정녀'(마태 1,18-25)로 해석,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하느님께서 몸소 보여주시는 표징으로 보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입장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인다. 두 번째로 성모 마리아의 잉태(루카 1,26-38)는 성모가 요셉 성인과 결혼하기 전 약혼시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뤄진 사건이고,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요한 복음사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 탄생'을 암시하고 있다(요한 1,13).

 교부들은 출산 이전과 출산 시, 출산 이후 동정성으로 나눠 살핀다. 우선 출산 이전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해 유스티노 성인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징이라고 설명한다. 이레네오 성인도 마리아의 동정성은 교회가 물려받은 유산이며, 교회가 정통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강조한다. 출산 이후 동정성에 대해 신약성경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암시를 얻을 수는 있다. 클레멘스 성인은 외경이던 야고보 복음서를 인용하면서 성모는 평생 동정이셨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성모의 평생 동정성을 선언했다. 출산 중 동정에 대해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불투명한 입장을 표명하지만, 오리게네스 교부는 △하느님은 전능하고 △생물 가운데 단성으로 출산하고 번식하는 경우가 있으며 △예수의 원죄없는 잉태가 보증되기에 성모의 출산 시 동정성은 보존된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성모의 동정성이 생물학적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영적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하느님의 전능성을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지닌다. 또 하느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학적 차원의 뜻도 지니고,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는 점에서 교회론적 의미도 있다. 정리=오세택 기자sebastiano@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