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 이야기

(21) 르네상스 시기 교회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namsarang 2010. 10. 2. 23:02

[조규만 주교 성모님 이야기]

 

(21) 르네상스 시기 교회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


                                                                                                                                            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을 살펴본다. 근대는 유럽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시기로, 인문주의와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웠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성모님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상으로 그렸다. 중세 모든 철학이 신에 대해 집중했다면 인본주의는 사람에 대해 집중했다. 인본주의자들은 마리아 신심과 성인 공경을 미신행위로 여겼다. 여기에 마틴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자들이 가세했다.

 영국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을 중심으로 하는 옥스퍼드 운동은 성모 신심에 큰 영향을 줬다. 옥스퍼드 운동(1833~1845)은 옥스퍼드대학교 젊은 교수들이 가톨릭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영국 국교회를 쇄신하고자 한 운동으로, 이 운동을 통해 교회 내부적으로 수도원 부활 등 가톨릭 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가시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1854년 '원죄 없으신 마리아 잉태' 교의가 선포되고, 1950년 마리아 승천에 대한 교의가 선포되는 배경이 됐다.

 에라스무스라는 학자는 성모 신심이 미신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했다. 진정한 종교 신심도 아니고 윤리적 내용도 결여된 겉치레식 신심이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정신적 병약자라고 하는 이도 있고,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는 기도하고 고행하는 수도자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하느님은 무서운 하느님이다. 루터가 세운 교회의 핵심 슬로건은 '믿음만으로, 은총만으로, 성경만으로'다. 가톨릭교회 믿음은 행실로 보여주는 것이다.

 개신교는 성모 공경을 반대하지만 루터가 처음부터 성모 공경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이 쓴 「루터와 마리아」를 보면 루터가 성모님 찬미가(마니피캇)에 대해 해설한 부분도 있고, 그가 가톨릭을 떠나기 전 성모님에 대해 강론한 것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성모 마리아의 완전한 동정성을 받아들였고, 마리아가 충만한 은총을 지녔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전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덕성이 아닌 하느님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우리도 은총을 받으면 성모님처럼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루터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마리아에게 중재기도를 할 것을 권유했고, 자신의 교회에서 예수 탄생 예고 축일을 지내길 원했다. 루터는 에페소공의회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다'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이 공의회는 신앙에 어떤 새로운 것을 정한 것이 아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신앙은 이미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있었다. 복음과 성경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도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 "마리아는 출산 전, 출산 중, 출산 후에도 온전히 정결한 동정녀였다. 마리아는 원죄로부터 구원된 정결하고도 거룩한 처녀다. 하느님의 선물로 꾸며진 그의 영혼은 원죄로부터 정결하다."

 그는 성모승천대축일 강론에서 "마리아는 교회 어머니요, 교회 원형이다. 교회 구성원일 뿐 아니라 구원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대표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라고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은 연옥에 관한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루터의 95개 조항에는 대사(大赦) 논쟁이 있는데, 이는 개신교에서 '면죄부'로 잘못 알려져 있다. 대사는 고해성사의 사죄 교리와 연옥에 대한 교리, 통공의 교리가 서로 맞물린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것이다.

 고해성사로 죄의 사함을 받지만 죄에 대한 대가는 보속을 통해 치른다. 그러나 보속의 효력은 전적으로 보속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죄가 고해성사를 통해 사해져도 남은 보속은 연옥에 가서 치르게 된다.

 우리는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과 기도의 공로를 다른 영혼을 위해 돌릴 수 있다는 교리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전ㆍ한대사를 베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신교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 없다.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아픔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기쁘게 만나기 위한 정화 과정이기도 하다. 지옥이 하느님과 결별을 의미한다면, 연옥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사랑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정리=이지혜 기자 / bonais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