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8세기 중엽부터 루터 종교개혁 이전까지인 중세기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대는 이미 성모님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다는 것이 제2차 니케아공의회(787년)에서 확정된 시기라서 이와 관련된 내용은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세기는 베르나르도, 알베르토, 토마스 데 아퀴노, 보나벤투라, 둔스 스코투스 등 대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성모님에 관한 논의는 주로 원죄에서 자유로운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마지막 생애, 즉 승천에 관한 것이었다. 또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때이기도 하다.
베네딕도회 베다 주교는 성모가 천사와 많은 사람에게 찬양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그분은 어느 여인보다 고귀한 분이라고 찬양한다.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인류 구원사업의 첫 번째 협력자라고 말하지만 결코 여신은 아님을 강조한다.
베다 주교는 비잔틴교회가 성모를 여왕으로 찬양했던 것과 달리 지상에서의 그분 삶의 겸손을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로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해 많은 이들에게 축복과 찬양을 받았지만 결코 지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느님 뜻에 마음을 쏟았던 겸손과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다. 베다 주교는 하와에게서 교만을 보고 성모에게서 순종을 본다고 비교해 설명한다.
그는 더 나아가 성경에 근거해 성모와 교회의 유사점을 끌어낸다. 성모와 교회 모두 동정이요, 어머니라고 강조한다. 또한 성경(루카 1,41)에 근거해 성모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요한 세례자가 모태에서 성화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성모가 주님의 어머니로 당연히 원죄로부터 성화됐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뛰어난 마리아론 학자이며 서방교회 마리아론에 많은 영향을 준 암브로시오 아우트페르트는 마리아의 승천 축일, 봉헌 축일 등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보다 성모승천, 정결례 축일 등이 더 강조됐다. 그는 성모를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더 나아가 예수를 사랑하는 데 멈추지 않고 모든 이들을 사랑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 성모의 승천과 무죄한 잉태에 관한 논쟁은 더 활기를 띈다. 이 시대 대부분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으로, 이 세상 어떤 이도 원죄를 면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원죄없이 태어나신 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면 프란치스코회 둔스 스코투스는 성모가 원죄없이 잉태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둔스 스코투스를 지지하는 프란치스코회와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지지하는 도미니코회 간 대결로 치닫게 했다.
한편 이 시대 대중들의 마리아 신심은 하느님을 엄격한 아버지로, 성모를 자애로운 대왕대비로 간주하는 외경에 바탕을 둔 허황된 성모 신심이 횡행했다.
토마스 데 아퀴노의 스승인 알베르토는 당시 예수와 성모를 동격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에 경종을 울린다. 하느님과 인간인 성모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음을 역설하며, 성모가 하느님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은총이 전해지는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모범적 신학자인 토마스 데 아퀴노 역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에 반대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성모가 구원자의 모친이 됐을 때 원죄가 사해졌다는 것이다.
성경은 지극히 거룩한 성모가 출산 전은 물론 출산 후에도 동정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자의 권위를 위해, 그 어머니의 영예를 위해서도 합당한 일이다. 동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으로서, 인간으로서 완벽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 혼인한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나야 혼인도, 동정도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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