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4~5세기 교부들의 성모님에 대한 생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300년 께부터 450년 사이를 교부들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중요한 성인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큰 공의회 4개가 열린 것을 주목해야 한다.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를 시작으로,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 에페소 공의회, 451년 칼체돈 공의회가 잇따라 열렸다.
일련의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모두를 지닌 존재로 논의됐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그간 많은 학자들의 논쟁, 이단들에 대한 단죄 등 아픔을 겪고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313년)한 것을 계기로 시작됐다. 그동안 그리스도교는 박해를 받으며 지하에서 활동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칙령을 내림으로써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교리 문제로 나라가 반쪽이 되는 걸 원치 않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주교들에게 한데 모여 교리에 대한 의견을 하나로 모을 것을 주문했다. 이에 따라 열린 것이 니케아 공의회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알렉산드리아노를 수행한 부제로 공의회에 참가했던 아타나시오 성인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해 끝까지 싸움을 펼친다. 반대파에 의해 7번이나 귀향을 떠나는 고난에도 불구, 아리우스파와 투쟁하면서 얻어낸 결론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아리우스라는 사제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기 때문에 예수를 하느님 아들로 주장하는 것은 모순된다"고 말한 것과 대치되는 것이다.
당시 교회 주류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아들이고,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분이라는 견해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의는 콘스탄니노플 공의회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아타나시오 교부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악마의 세력에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언급했다. 그는 성모님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하느님 자녀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당시 교부들은 이런 부분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행위가 성모님을 통해 이뤄졌음에 주목했다. 성모님이 그리스도와 한 쌍을 이루는 신부로 묘사되기도 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디디모라는 교부는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성모 마리아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기 예수를 낳은 후 영원히 손상되지 않는 동정녀로 남았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이 시대 교부들은 동정성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만 해도 동정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디디모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예언의 은사 등으로 강조하며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에피파니오라고 하는 교부는 성모님 죽음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그는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것처럼 성모님 육신이 하늘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입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 당시에는 여성 사제직에 관한 논쟁이 많이 오고갔음을 알 수 있다. 성모님께 사제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여성 사제직에 대한 논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공헌을 한 카파도치아 교부인 바실리오, 니싸의 그레고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한 것에 대해 단순히 파이프에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중간 도구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강조했다.
성모님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신앙의 모범이 되신 분이다. 정리=이서연 기자 kitty@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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