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초세기 교부들 문헌에서 나타나는 성모님 모습을 보자.
사르디나의 멜리토 주교는 부활절 강론에서 예수님을 순수한 어린 양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묵묵한 어린 양, 희생된 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를 양으로 비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멜리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강생, 수난과 죽음, 영광의 부활과 승천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한다. 마리아의 동정성은 강생, 즉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모성에 있어서 본질적 신비를 잘 나타내고 있다. 비잔틴 전례와 동방교회 역시 이런 마리아를 십자가 아래 꿇어앉아 있는 어린 양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성부와 말씀과 성령은 한 분이며 어디에서도 동일시된다고 했다. 동정 어머니 역시 한분이라고 강조한 클레멘스는 마리아를 교회라고 부르면서 '주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회는 동정인 동시에 어머니이며, 사랑이 충만하고 거룩한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한다'고 전했다. 이는 훗날 교부들에게 마리아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로마의 히폴리토는 '마리아는 순금으로 입혀진 궤입니다. 그 내부는 말씀으로 인해, 외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며 마리아의 완전함을 극찬했다. 마리아는 하느님 아들의 강생과 인간 구원의 신비에 본질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사용한 '동정성의 첫째'라는 표현은 예수 탄생 이후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한 첫 번째 언급으로 간주된다.
신앙고백인 신경에도 2세기부터 동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나타내는 부분이 있다. 히폴리토가 전하는 초기신경에 나온 마리아의 동정성은 사도신경에도 나온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381년)도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화하셨고, 사람이 되셨고'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리옹 주교 이레네오는 마리아의 동정성을 교회 신앙에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이 여느 인간처럼 정상적 출생과정을 거침과 동시에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동정 탄생은 인간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사건으로서 마리아의 순결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함과 유사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 역사는 창조에서 구원, 즉 하느님께로 계속 진행ㆍ발전한다는 이론을 자신의 신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다. 창조된 세상이 아담의 잘못으로 타락했는데, 그 잘못을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처음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라 제2의 창조로 불릴 만큼 훨씬 뛰어넘는 관계로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과 대조되듯 마리아는 하와와 대조된다. 그의 대조 이론은 후에 교부들에 의해 계속 발전되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도 수용되고 있다.
이레네오의 '마리아-하와' 대조 이론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와와 마리아 모두 행위했던 순간 처녀였다 △천사(악마)에게 메시지(좋은 메시지와 나쁜 메시지)를 받았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하와는 뱀에게 순종했다 △그들 행위는 그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등이다.
이레네오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했던 '구원의 원인'을 마리아에게 적용하고, 아담에게 적용했던 '죽음의 원인'을 하와에게 사용한다. 또 마리아를 '처녀 하와의 변호자'로 칭하며 모든 여성의 구원자로 묘사하고 있다. 한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역사 계획,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마리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후에 이레네오가 마리아를 '구원의 원인', '그리스도의 동반자',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데 이어 '공동 중재자ㆍ구속자' 등으로 표현한 것은 많은 논란이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결정적으로 중재할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그분이 하시는 일에 마리아가 도움을 준 것일 뿐,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임에도 사람은 항상 남의 탓을 한다. 아담은 자신의 죄를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리=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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