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오리게네스 교부는 초세기 200년께에 사셨던 대학자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학자로 언어와 문화,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할 때 본문의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상징적ㆍ영성적 의미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도들이 불신앙을 겪는 동안 주님의 어머니는 그러한 불신앙으로부터 보호되었는가? 주님의 수난 동안 그분이 그러한 불신앙을 겪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분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만일 모두가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었고 속죄되었다면'(로마 3,23) 마리아도 그 순간에 불신앙을 겪었다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시므온이 그런 예언을 한 것입니다."(오리게네스의 '루카복음에 관한 강론' 중)
오리게네스 교부는 시므온이라는 예언자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이 아이 때문에 장차 가슴에 칼을 꽂는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은 성모님이 신앙의 어둠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시므온은 어머니 아픔은 아들이 겪는 아픔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예언했다고 오리게네스는 해석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를 '믿음의 어둠'으로 표현했다. 성모님은 완벽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조차도 믿음의 어둠을 겪었다. 성모님도 믿음의 어둠을 겪고 살아가신 분이다.
성모님을 완벽한 존재로 꾸미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그 분을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고 한다. 은총이란 말은 하느님의 사랑ㆍ총애를 의미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총애를 잃지 않으신 분이지만,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신 분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서슴없이 불렀다. 후에 에페소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맞지 않다는 이견이 있었지만, 오리게네스 교부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했다. 이 명칭은 성모님이 여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모가 낳은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교부가 성모님에 대해 첫 번째로 주장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성과 동정성은 신앙에서 필수적 요소라는 점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경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표현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당시 반대자들 중에는 예수를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 생각했던 이들도 많았고, 심지어 로마 판테라라는 군인의 성폭행으로 낳은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이사야서 7장 14절에 나오는 이사야 예언으로 이를 반박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여기서 표징은 기적이다. 여성(여인)이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 아니라,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게 기적이라는 의미에서 여성을 동정녀로 번역하는 게 타당하다. 오리게네스는 사람들은 남자 아버지에게서 여성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판테라라는 이름 자체는 파르테노스라는 희랍어인데, 이 말은 동정녀, 처녀라는 뜻이다. 오리게네스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니냐고 반박한다. 또 원죄 없는 예수님의 잉태를 보증하기 위해서도 동정녀이신 성모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제시한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완벽한 제자라고 했다. 성모님이야말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셨고, 그래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분이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성모님의 성덕을 많이 찾아냈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에는 구원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믿음, 희망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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