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성지순례 후기 나눔터(바티칸·이탈리아 성지) |
세상의 중심에서 영혼을 깨우리
글 : 정은희(마리아 막달레나)
세상의 중심에서 영혼을 깨우리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윈 순결한 사랑이 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가지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의 길을 떠나라.
고진하-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이 시와는 정반대로 밤을 꼬박 새워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짐을 챙겨 공항버스에 오른 게 문제였다. 멀미할 것 같던 예감이 사실로 다가오면서, 난생 처음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부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 시간여 끙끙 앓았다. 평소 ‘사이비 도사’라 불렸으니, 그동안 쌓은 실력을 총동원하여 관련 혈자리를 누르면서 기도할 수밖에. 제발 무사히 도착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인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갈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토하지 않은 것만 감사했다. 그리고 비행 시간 내내 굶으면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왜 이 순례에 참가했는가를 생각해 보니, 별로 뚜렷한 지향이 없다. 지난 번 성모님 성지 순례가 너무 좋았고, 남편과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탈리아에 다녀왔기에, 마지막 차례구나 싶어서 뒤늦게 추가 신청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의 여정은 노아의 방주처럼 키잡이이신 하느님 뜻에 맡길 수밖에... 당신이 보여 주시는 것을 잘 보도록 제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독일 최대 공항이라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화장실 종이가 갱지라니! 역시 검소하고 실용적인 독일 문화였다. 그에 비해 현대적인 인천 공항의 모든 편의시설이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 갑자기 잘 살게 된 졸부가 조그만 것에도 너무 흥청망청 쓰는 게 아닌가 반성도 해본다. 로마에 도착하여 그 밤을 뒤척이다 보니, 일어날 시간이었다. 시칠리로 가는 국내 공항의 일처리가 늦다. 작년 스페인에서도 겪었던 일이다. 빨리빨리라고 비난받지만, 적어도 일처리에선 한국이 최고다. 삼사백 년에 걸친 근-현대화 과정을 삼사십 년에 밟았으니 그럴 수밖에. 내 성격 역시 어릴 때와 달리 마음이 급하니, 걸음 또한 본당 신부님이 흉내낼 정도로 빠르고 남 보기에 발보다 머리가 먼저 나간다고 한다. 대학시절부터 한 번에 두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탓이다. 그래서 늘 조신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느려 터진 오늘 같은 날에는 그래도 내 성격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은 그 사람 고유의, 그 민족 특유의 성격을, 그 지방의 지세와 경제적 특성에 맞게 형성하셨나 보다. 사실 세상 모두가 한 가지 성격이라면 얼마나 숨막힐까?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할 때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피어오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으로의 여정에서 드러날 이탈리아 국민성과, 순례 팀원들의 다양한 성격, 내 안에 감춰진 다양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팔레르모 공항은 얼핏 보기에 우리 제주도처럼 정다웠다. 그러나 자신의 직업에 소명을 가지고 너무나 즐겁게 일하는 식당의 웨이터 아저씨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점심은 최악이었다. 지나치면서 흔한 야채들을 보았는데도, 돼지고기와 전채나 후식도 감자 튀김 일색! 센스로 밥 먹고 산다는 이탈리아인, 그것도 풍요로운 남부 시칠리 섬에서 이런 무감각한 식탁과 만나다니... 아무리 ‘머리 안 깎은 중’이지만, 앞으로 먹는 재미는 포기해야 되지 싶다. 그래도 그 다음에 방문한 성당에서 11mm 천정 구멍에서 비치는 햇빛으로 열두 달 내내 정확히 바닥에 그려진 황도의 선들을 가리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몬레알레 대성당 청동문 이교도 신전 위에 세워진 몬레알레 성당의 모자이크,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그리스도는 우주의 주재자시다)’를 보았는데, 기대한 만큼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다. 며칠 뒤 방문한 체팔루, 과거의 신전을 재활용하면서도 색유리화는 현대 추상화로 처리한, 그야말로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룬 더 작은 성당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언하시는 우주의 주재자 예수의 눈빛을 다시 만났을 때는 전율이 일었다. 토크라토르는 권세라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삶 구석구석에서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는가? 큰 원칙은 인정하면서도, 작은 것들은 내 멋대로였지 않는가? 특히 신부님의 미사 강론인 어디에서나 나를 보고 계시는 판토크라토르! 그날의 독서와 복음은 사울과 레위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모든 전리품을 없애버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쓸 만한 귀중품을 주님께 바치는 게 더 이로울 거라는 자의적 판단 때문에 버림받은 사울의 말로가 너무 비참했다. △ 몬레알레 성당의 모자이크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 미사가 끝난 뒤 대성당 옆 허름한 주택가의 빨래까지도 정답게 느껴지니, 하느님이 예비하신 때는 따로 있나보다. 아니면 몬레알레에서 학습한 효과가 지금 나타나는가? 하여튼 같은 대상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보인 이 며칠의 경험은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말처럼, 앞으로의 순례에서 지금의 내 느낌에 집착하지 않고 흐르게 두면, 설혹 감동이 안 오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께서 나중에 정리해 주실 것이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사실 두 번의 내 경험으로 볼 때 순례의 핵심은 늘 미사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여정에서 그때마다 묵상하며 머무를 수 없기에, 모든 경험들이 미사에서 중심을 잡고 정화되었다. 매일 미사가 없다면 순례가 아니라 관광에 가까우리라. 작년 루르드에서 신부님 없이 관계자와 함께 온 한 순례팀을 만났을 때 우릴 바라보는 그들의 부러운 눈길을 보아도, 존경하는 원장 신부님을 모시고 매일 미사에서 에센스 강론을 듣는 복됨이여! 그냥 그랬던 16일의 여정도 알퐁소 경당에서 드렸던 저녁미사는 너무 좋았다. 미사 뒤의 기도모임을 가톨릭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멀리 찾아온 손님들에게 양보하는 시칠리 할머니들,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 곳곳마다 꽃으로 장식된 성모상의 정다움!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이탈리아 여성 취업의 비율이 90%라면 시칠리는 60%이란다. 보통 부와 여성 취업, 신앙은 반비례한다. 경제적 부를 위해 여성 취업이 늘어나면 ‘마르타와 마리아’처럼 신앙은 우선순위상 일보다 뒤로 밀린다. 교회의 근간은 가정인데, 맞벌이로 바뀌는 우리나라 2-30대, 태어나는 아이들의 신앙을 어찌해야 할까? 결국 신앙의 중요함을 아는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아그리젠토 그리스 신전들의 계곡의 폐허, 그러나 쓸쓸하지 않고 드넓게 펼쳐진 모습이 자유롭고 평화로웠다. 그냥 신전 한 모퉁이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아몬드 꽃향기를 맡으며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다. 자연과 유적이 한몸이 된 그곳에서 그렇게 한나절을 지내고 싶다. 조선 시조모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 바로 옆에서 만 13년을 살았지만, 이런 자유로움은 맛보지 못했다. 아마 우리나라 유적지 부근에 널린 상가처럼 번잡스럽지 않아서인가? 외부에 기념품 가게 하나만 있는 그들의 깔끔함, 그 넓은 유적지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여유가 부러웠다. 땅이 넓지 않으면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다. 한없이 펼쳐지는 평야와 구릉지대, 한 해에 이모작을 넘어 삼모작까지 가능하다는 이들의 풍요로운 땅에 대한 부러움은 순례 내내 계속되었다.
△ 신전들의 계곡에서...
△ 주노 신전
△ 콩고드 신전 △ 헤라클레스 신전
△ 제우스 신전 이와 반대로 오후에 들린 시라쿠사의 ‘눈물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1993년 완성된 현대 식 대형 성당이다. 미사를 드리는데, 계속 메아리쳤다. 얼마 전 신축한 본당이 울림 때문에 강론이 잘 들리지 않아 음향 담당이 애먹었는데, 여기서는 그 울림이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들어온다. 이 현상은 그 뒤에 아씨시 성당 등 다른 곳에서도 이어졌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말 중심이다. 말은 머리에 머물다 사라진다. 그러나 오래 된 성당들은 말이 아니라 소리 자체의 울림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서를 소리 내서 읽으면 어느 순간 내 소리가 성서 말씀으로 내 안에서 울려 퍼질 때가 있다. 그처럼 소리가 울리면 그 소리는 기도로 내게 되돌아온다. 그레고리오 성가나 성무일도가 바로 그 경우다. 그래서 옛 성당은 성가대석이나 가대를 공들여 꾸몄나보다. 말이 소리라는 상징으로 바뀌면 그 상징은 오래 간다.
△ 시라쿠사 눈물의 성모 마리아 성당 천정
△ 시라쿠사의 성모님 눈물이 묻은 손수건등을 넣은 함 자료집을 보니, 이 성당은 자연채광을 위해 153,7m의 높이까지 올렸단다. 그래서 더 울렸나? 그런데도 그 주요 메시지는 눈물과 침묵이니, 놀라움! 이곳에서 1953년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사기 성모상이 나흘 우셨는데,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으셨으니... 최근의 나주 율리아 사건이 겹쳐진다. 율리아 역시 아마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기적을 체험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기적을, 가짜 메시지를 자기 나름대로 조작하기 시작한다. 기적의 私有化! 하느님의 私有化, 지식의 私有化,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한테 매어놓고 싶은 私有化... 내 안에 숨은 갖가지 私有化가 무섭다. 시라쿠사의 성모님이 남기셨을 만한 메시지를 ‘슬픔과 기다림, 고통, 기도, 희망의 눈물’이라고 교회가 정리했다(“순례영성” 23쪽).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침묵이다. 모든이에게 저마다의 언어로 꼭 필요한 만큼 다가가기에... 요한 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에 관한 예수의 침묵! 침묵의 주제는 순례를 마칠 때까지 마치 간헐천처럼 내 안에서 솟아 올랐다.
그래도 그 뒤 며칠 내내 안개로 뒤덮인 북부에 비하면, 남부 시칠리 섬에서의 나날은 영화 <대부>의 주제가 “wine coloured days, wormed by the sun"이었다. 특히 팔레르모산 포도주 DONNA FUGATTA(집 나간 여인, 14도)를 맛보자 12도 포도주는 물맛이었으니...
북부 토리노에 접어들자마자 도심에서 시위가 계속되었다. EU체제로 이탈리아 입국이 무비자이기에 동유럽과 터키를 거쳐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비정규직 노동자가 넘쳐 나면서 정작 토리노 젊은이들은 실직 상태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신나치즘이 하나의 탈출구이다. 이탈리아의 남북 갈등은 우리의 영호남 갈등보다 심하단다. 어느 영화에선가, 부지런하고 이지적인 부유한 북부와 감정적이면서 가난한 남부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 북부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던 반응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젠 이탈리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문제되는 세계화가 여기서도 문제이다. 산업 자본에 이어 금융 자본이 전 세계를 지배할 때 자본주의는 완성된다는 주장도 있던데...
또 하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 문명의 문제점은 그리스도교의 쇠퇴와 맞물린 이슬람교와 불교의 유행이다. 작년에 스페인의 가톨릭 젊은이가 이슬람교를 선택하면서 두 번째 부인을 얻는 과정을 그린 <어떻게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남녀의 심리적 갈등도 재미있지만, 이슬람교의 성직자인 이맘과 전례, 그들을 정서적으로 지지하는 우리 식의 소공동체 모임이 묘사되어 있다. 토리노 역시 급속도로 이슬람화된다고 한다. 해결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자기 신원을 살아가고, 평신도 역시 세상 서리에서 ‘예수를 닮아서 예수를 담은 공동체’, 즉 원천으로 돌아가 원칙대로 살아가는 길밖에 없는데...새삼 아그리젠토 성당에서 보았던 나이 드신 분들의 회합 모습이 생각난다. 그에 비해 대도시 토리노에선 제각기 애완견을 끌고 다닐 뿐이다. 누가 더 행복한가? 엠마뉴엘 2세의 왕궁 광장에서 북을 두드리는 청소년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그 해답은 우리의 원천인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길, 바로 토리노 대성당에서 문 닫기 전 허겁지겁 보았던 예수님의 수의, ‘신도네’였다. 얼굴 부분은 예전에 보았지만, 몸 전체를 촬영한 사진에서 못에 박힌 발의 형태나 상처의 핏자국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부르짖고 계셨다. 우리가 드리는 매일 미사는 민방위 훈련이나 소방 훈련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 제물로 봉헌하는 실제 상황인 것이다. ‘당신의 수의를 경배하고 당신의 수난을 기억합니다’라고 적힌 기도문처럼, 예수의 수난을 내 몸과 삶에 기억하는 일.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6,14). △ 토리노 대성당 종탑 아침에 ‘도움이신 마리아 성지’와 살레시오회 총본부에 갔다. 내가 여섯 살 때 사고를 당했는데 근처의 살레시오회 이탈리아 수녀님들이 응급처치를 해서 병원으로 호송해 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낯모르는 아이에 대한 그분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느껴졌기에, 어른이 되면 성당에 가야지 하고 속으로 맹세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날, 내 발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느님과의 첫 만남이 된 그 특별한 인연을 떠올리며 찾아간 그곳에서 어젯밤의 의문에 대한 또하나의 해답이 보였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1840년대에 길거리를 방황하며 범죄자로 될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청소년들을 교회로 모아서 교육하고 기술을 가르쳤던 돈 보스코. 초라한 장작더미 움막이 씨앗이 되어 이루어진 도움이신 마리아 성지.
△ 도움이신 마리아 성당
△ 도움이신 마리아 성당 돔
△ 돈보스코 성지 정원
△ 돈보스코 성인 벽화
△ 살레시오회 신부님은 강론에서 무엇보다 입구 벽에 쓰여진 ‘Ricordi Religiosi 수도자를 기억하라’는 문구를 강조하시며 “청빈은 자본주의에서의 해방, 정결은 성으로부터의 해방, 순명은 권력추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풀어 주셨다. 그리고 돈 보스코가 아홉 살 때 꾸었던, 늑대가 양으로 변한 꿈이나 도움이신 마리아 성지에 관한 꿈처럼, 우리는 작은 소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꿈에서 만날 수 있으며, 현 교황께서 성인품에 올리고 싶어하신다는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역할을 강조하셨다. “사제가 되어 풍요를 맛보려면 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마라”는 그 어머니의 올곧음! 또한 살레시오 수도회와 책 바오로회 등은 시대의 요청에 따른 복음화였다고 하셨는데, 다원주의 사회, 자본주의 세계화 사회인 오늘날 복음화의 형태는?
우산 모양의 소나무와 히말라야 씨이타가 함께 어우러진 밀라노는 온통 안개였다. 안개는 비나 눈과 달리 스멀스멀 보이지 않게 주위를 에워싼다. 그래서 안개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그 공격에는 모든 사물이 제 위치를 잃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주위를 맴돌다가 이내 맥을 놓아 버린다. 안개 속에선 어떤 게 옳고 무엇이 아름다운지 분간하기 어렵다.
△ 밀라노 대성당 안개를 뚫고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서 본, 미켈란젤로가 89살에 죽던 마지막 순간까지 작업했다는 <론다니니家의 피에타> 역시 완성? 미완성? 피에타 옆에 힘찬 종아리와 팔(?)이 군더더기처럼 붙었기에 미완성이란다. 로마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가 젊고 깔끔하며 완벽하다면, 이 피에타는 늙고 거칠다. 바싹 마른 낙엽처럼 손에 쥐면 바스라져버릴 것 같다. 그에 비해 오히려 도록에서 분명히 보이는 양 옆의 팔과 다리는 생명으로 약동하는 젊음이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서 늙음과 죽음, 젊음과 생명이 순환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가? 莊子였나? 소위 보검을 만드는 최고의 솜씨는 마지막 칼날을 다듬는 과정에서 칼 끝을 무디게 한다고 한다. 꼭 필요한 경우에 이 칼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평소에는 칼날이 아무나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추사 김정희의 말년의 글씨 역시 ‘古拙하다’의 ‘졸’을 붙이는 것처럼, 죽음을 바라본 미켈란젤로도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형식, 아니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을 벗어난 경지가 아닐까? 이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조각하시는 최봉자 수녀님께 “초기 작품들은 진솔한 느낌을 주는데, 지금 수녀님 성모자상은 너무 단아하다”고 말씀 드렸더니, “내 작품은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도 드리는 대상이야. 작품성을 높이려고 내 맘대로 못해. 행여 사람들에게 분심 주면 안 되잖아.”라고 대답하셨다. 예술에도, 삶에도 여러 경지가 있다. 판단하실 분은 하느님뿐!
△ 스포르체스코 성채 박물관 스칼라좌로 이어지는 패션의 거리, 내가 아는 명품들 이름이 빛나는 화려한 밀라노를 뒤로 대학 도시이자 안토니오 성인의 도시 파도바에 왔다. 책에 자주 등장한 도시라서 그런지 낯설지 않다. 특히 안토니오 대성당은 금박 모자이크 천지인 밀라노 대성당과 달리 소박해서 정다웠다.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때문에 돈 드는 모자이크보다 프레스코화를 선호했다고 한다. 이 성당에서 늘 탈혼 상태에 있었기에 비행사들의 수호 성인으로 불리는 코페르티노의 요셉 성인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富者의 심장이 돈통에 담긴 그림은 섬찟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다닥다닥 붙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감사 편지가 눈물겹다. 사진, 편지, 그림으로 표현된 이런 감사의 공간은 앞으로 가게 될 성당마다 있었다. 신학원 일 년 동안 정의철 신부님께 배운 전례의 핵심은 ‘아남네시스(기억)’였다. 탈출기를 비롯한 모든 성경 역시 그분께서 베푸신 자비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그 기억을 어떤 형식으로든 남기지 않으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은 그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제 힘으로 살아온 양 뻗댄다. 기억을 남에게 나눈 것이 바로 증언이다. 이 증언 때문에 선교와 순교가 계속되었다.
신부님은 강론에서 13세에 순교한 동정 아네스를 말씀하시며, 안토니오 성인 역시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코 회원들의 유해가 낳은 열매이며, 순교를 위한 삶을 사셨다고 가르쳐 주셨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하셨다는 생전 그대로 보존된 안토니오 성인의 마른 혀/ 턱/ 성대! ‘그토록 박식함에도 겸손한 형제’, 살아 있을 때부터 성인으로 불렸던 그는 프란치스코에게 지식이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준다는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몇 년 전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영화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분의 지식과 겸손이 지금처럼 와 닿지 않았다. 百聞而不如一見? 대부분의 지식은 교만으로 향한다. 나이 들어서야 그 대단한 지식들이 허접쓰레기로 보이니, 지혜는 늘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격인가?
동방 무역의 중심지, 거기에서 얻은 부로 재건한 도시, 5-6백 년 전 그대로의 베네치아는 이 도시가 모델인 비발디의 ‘사계’가 주던 경쾌함보다 도시 입장료를 내야 하는 불쾌감이 앞섰다. 지금 내 업적도 아니고 과거 조상들을 우려 먹으면서 관광사업으로 돈 벌면 됐지 도시 입장료라니, 해도 너무 한다 싶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날 만난 한국 관광객은 우리 팀을 둘로 쳐서 약 6팀, 약 120-140명이 國富를 쏟고 있다. 좀 오래 머물렀으면 밑천이라도 건졌으련만, 너무 시간이 없었다. 먼저 이곳에 다녀간 남편이 극구 칭찬했던 산 마르코 성당을 30여 분밖에 못 보았으니. 이럴 때는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고, 보고 머무르는 데 시간을 더 주십사 건의하고 싶다. 아랍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 속에 마르코 성인의 유해를 감추어서 여기까지 옮긴 옛 그리스도인들의 융통성이 그립다. 사랑하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유해 앞에서 말씀의 봉사자인 내게 당신이 증언한 예수를 온전히 전하는 은혜를 주시길, 또 우리 아이들이 말씀에 맛들이고 말씀을 사랑하는 은혜를 달라고 청하였다.
△ 산 마르코 대성당 앞 중앙제단에 놓인 마르코 복음사가의 유해와 대조적으로, 그 뒤의 황금성단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원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의 경험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동로마 제국 신자들은 ‘형제 그리스도인’보다 오히려 ‘이방 이슬람인’을 더 반가워했다고 한다. 그 옆 보물실에 보관된 정조대와 약탈 보물들. 현대 개신교 신학자 니버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했듯이, 도덕적 개인들의 집합인 사회집단도 얼마든지 비도덕적일 수 있다. 성지 탈환이란 명분하에, 그리고 신앙을 위하여, 남은 여자들에게 정조대의 열쇠를 잠그고 비장하게 출정한 그들이 도대체 무슨 미친 바람이 불어서 약탈자로 바뀌었는가? 최근의 386 세대에서 보았듯이, 대다수 운동의 운명은 시간이 지나면 초창기의 이상은 사라지고 이해관계에 함몰되는 과정을 밟는다. 4차 십자군 운동 역시, 1차의 初心이 사라진 끝은 아예 처음부터 돈이었나? 그들이 약탈해 온 보물들로 성전을 꾸밀 때, 바로 앞 중앙제단의 마르코가 전한 복음과의 충돌, 그 배신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제정신이 드니 부끄럽기에, 남 보란 듯이 드러내지 않고 성인의 유해 뒤에 황금성단을 꾸몄나? 그래도 그들이 남겨 주었기에, 지금 이 아름다움을 누리는 내 눈은 즐겁다.
베네치아 광장에 나오니 베네치아를 찍은 영화 <냉정과 열정>에서는 그리도 아름답게 보였던 비둘기들이 칙칙하다. 여행 온 가족인가, 어린 여자아이에게 비둘기떼가 덮치자 공포로 소리를 지르는데, 엄마는 좋아라 어쩔 줄 모른다. 우둔한, 무감각한 그 젊은 엄마에게 순간 분노를 느낀다. 어른인 자기는 엄청 재미있겠지만, 히치코크 감독의 그 유명한 영화 ‘새’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 꼬마에게는 다시는 하느님의 어여쁜 창조물인 새들을 가까이 하지 않을 치명적인 상처다. 아이가 계속 악을 쓰자 그제서야 비둘기떼 밖으로 아이를 혼자 내놓고 부부끼리 낄낄거린다. 아이의 두려움에 공감할 줄 모르고, 그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는 부모,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라벤나의 비탈레 성당. 한국인들은 잘 오지 못하는 곳, 특별히 모자이크가 유명하다고 들었기에, 부탁받은 도록들과 모자이크 도기들을 샀다. 신부님이 지금까지 우리의 여행지를 ‘정열의 팔레르모/ 신들의 아그리젠토/ 사색의 토리노/ 탐미적인 밀라노/ 명상의 파도바/ 이벤트 베네치아/ 우수 어린 라벤나’라고 요약하신다. 寸鐵殺人!
△ 성 비탈레 성당
△ 성 비탈레 성당 모자이크 피렌체; 르네상스의 요람. 이탈리아 문학의 삼총사인 단테, 보카치오, 페트라르카의 도시, 르네상스 삼대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고향. 최고수 정치가인 마키아벨리와 메디치 가문의 도시. 세례당 앞의 단테상은 메디치 가문의 미움을 받을 만큼 성깔 있는 표정이다. 하기야 예술가치고 성깔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바흐 정도가 낫다고 할까, 성인도 제 성깔대로 성인 된다고 하니, 문제는 그 성깔을 어떻게 다스리고 물꼬를 어느 방향으로 터서 흐르게 하는가이다. 이것은 우리 凡人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죽은 뒤 하느님을 뵈면 그분은 ‘사느라 애썼다’는 한 말씀만 하신단다. 우리도 모르는 마음 밑바닥의 저간 사정을 다 아시는 분이시니, 루가복음처럼 악인이나 선인 모두에게 비와 햇빛을 주실 수밖에. 그분께 악인이나 선인이라는 우리 판단은 도토리 키재기이다. 그래서인지 세례당 정면의 <최후의 심판>에서 예수가 정의의 심판을 주재한다면, 성모님은 자비의 심판을 호소하신다. 인간 삶에서 정의와 자비는 늘 한쪽으로 치우친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진실은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는 입맞춘다(시편 85).
△ 피렌체 전경
△ 단테 동상
△ 성 십자가 성당 설명을 들으면서 흘낏 본 세례당의 문은 27년에 걸친 기베르티의 작품으로, 도록에서 다시 보니 대단했다.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칭할 만한데, 아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고 했던가, 모르니 스쳐 지나갔다.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화려한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돔 역시 도록에서 보니 정말 아름답게 빛났는데, 실제 별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 버팀목 없이 처음으로 돔을 완성한 브루넬리스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사진은 최고의 순간에 대상의 에센스를 표현하지만(그래서 그 순간을 만나려고 며칠을 기다리는 그들의 수고에 감사) 우리 눈과 그 눈을 지배하는 마음은 순간순간 다른 것들에 휘둘린다.
△ 세례당의 문
△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대성당 지하의 박물관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었는데 보지 못했다. 한때 나와 일치시켜 묵상했던 니코데모에게 늙고 지친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투영했다는데... 또 보지 못해 아쉬웠던 것은 도나텔로의 <유딧상>과 미켈란젤로의 <네 명의 포로들>,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 <다윗상>이다. <다윗상>은 실물 크기의 복사품을 전후좌우로 열심히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다. 작가가 고심하며 가감삭제하는 진통 과정을 생략하고 분만한 아기만 베껴서인가? 시인 까비르는 ‘신성한 것을 향해 다가갈 때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면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도 진짜는 감동을 준다. 이날 ‘너는 진짜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내게도 어쩌다 가끔 진실을 드러내고 또 그 진실을 알아보는 순간들이 있다. 인생은 금싸라기에서 14K, 14K에서 18K, 24K로 정련되는 과정인가?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과 같으리라.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2-3). 그래서인지 성 십자가 성당의 유명인사들의 무덤, 단테, 갈릴레오, 미켈란젤로에 관한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기에 도나텔로와 죠토의 작품들을 보러 다녔다. 누구나 살다가 죽는다. 다만 진실을 보고 표현한 한 순간만 남는다. 베네치아의 리알토 다리처럼, 베키오 다리에서도 보석과 유리세공품이 찬란하게 빛났다. 인간은 가도 보석은 남고 그 아름다움은 여전하구나. 신부님은 강론에서 “세계사는 율법과 자유의 순환고리이며, 하느님을 떠난 인간 해방과 자유는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르네상스를 평가하셨다.
다음날 피사 대성당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갈릴레오가 그 대성당의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고 발견한 ‘진자의 등시성’을 생각해 본다. 마음의 길 역시 어느때나 흔들린다. 한결같음은 인간에게 어려운 덕목이기에-솔직히 말해서 한결같은 사람 옆에 있으면 질리지 않는가?- 다만 진자운동처럼 작은 흔들림으로 제자리에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충분하면 그리고 넘치면 돌아오는데, 나 자신이나 남을 기다리기 어렵다.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아마도 진보인 척하는 내 성향 때문인가? 문제는 늘 ‘척’이다. 보수든 진보든 제대로 살아내면 뭔가 길이 보이는데, 척하면 발전이 없다. 내게는 더 이상 진보나 보수가 중요하지 않고, 무엇이 지금 내게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이고 방법인가의 분별이 문제다.
△ 피사의 세례당, 대성당, 사탑
△ 피사의 세례당
△ 피사 대성당
△ 피사의 사탑 피렌체와 역사에서 늘 대립되었던 시에나. 표준어인 시에나어답게 언어의 주보성녀이신 카타리나 성녀의 고향. 24번째 딸이라니 그 엄마는 평생 애만 낳고 사셨나, 또 無學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중심에서 분쟁을 조절할 수 있었던 그 지혜는 무엇인가, 늘 궁금하던 성녀였다. 성녀의 생가 성당에서 드린 미사에서 신부님은 “얼마나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과 일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성인의 유해 쟁탈전이 대단했던 중세, 그래서 성인이 되면 좋은 의미로 유해를 조각조각 나누어 가졌던 시대, 성녀의 엄지 손가락과 성지 순례를 배경으로 한 소위 픽션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 카타리나 성녀의 인기는 대단했나보다. <간디 어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카타리나 성녀는 입고 있는 외투를 가난한 이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사랑의 옷이 그 외투보다 더 안전하게 날 덮어줄 것입니다.’ ”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성녀의 책인 <대화>는 신학원 1학년 때 박일 신부님이 영성교재로 추천했는데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아직 먼지 투성이다. 그걸 읽었더라면 성녀에 대한 공경과 시에나 순례가 남달랐을텐데... 아쉽다.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으면, 오는 기회도 놓쳐 버린다.
△ 성녀 카타리나 생가 △ 성녀 카타리나 상 가리비 모양의 캄포 광장에는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에 시달리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출연으로 최초의 은행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 광장에서 유명하다는 가이아 분수는 들어오지 않고 그 앞의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눈길을 끈다. 순례 내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 우리 지하철에서도 낯설지 않는 풍경이다. 사실 16,7세에 결혼한 우리 부모 세대는 청소년 문제가 없었고, 우리 세대 역시 성을 금기시한 금욕주의 문화에서 공부한 안전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아무런 보호막 없이 성의 시대에 내팽겨진 상태다. 정작 성으로 돈을 버는 건 어른들인데... 이제는 대학에 들어간 아들딸에게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공공장소에서는 포르노로 보인다’고 읊어대지만, 자기네 공간을 지니지 못한 이 아이들의 뜨거운 피를 어찌하랴. 헤르만 헤세의 소설처럼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청춘도, 정욕도, 낭만도 시든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6-17). 까를로 까레토의 <도시의 광야>는 지하철에서 다른 이와는 상관 없이 오로지 입맞춤에 열중한 젊은이들처럼, 도시 역시 하느님을 만나는 광야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 시에나 시청
△ 은행으로 사용되던 건물
△ 가이아 분수
△ 광장의 가리비 모양의 시작 부분
△ 광장의 젊은이들 드디어 아씨시! 황제파와 시민파의 대립 등 전쟁이 계속되던 아씨시를 평화의 도시로 바꾸고, 지옥의 언덕으로 불리던 사형 집행장을 당신 무덤으로 선택하시어 천국의 언덕으로 바꾸신 프란치스코의 도시.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에서 읽었던 일화; 하루는 성인이 제자들을 데리고 선교하러 가셨는데, 성 안을 한바퀴 둘러 본 뒤 돌아가자고 하셨다. 의아한 제자들이 우리 언제 선교하죠라고 묻자,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우리 얼굴을 보여 주는 게 바로 선교라고 대답하셨단다. 모든이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가난, 완전한 기쁨! 우리가 이틀 머물 순례자 숙소는 domus pacis(평화의 집)라는 이름처럼 평화롭고 정갈했고 음식도 맛있다. 식당에서 즐겁게 서빙하는 아저씨의 평화로운 얼굴에 반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사층 경당에서 기도하다가 성모님의 왕관이 아름답게 빛나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갔다. 발길 끌리는 대로 자리에 앉아 성당 안에 울려 퍼지는 성무일도를 들으며 조배하는데, 노리치의 쥴리안 성녀의 ‘all was well, all is well, all shall be well’이 떠올랐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나 자신조차 싫어하는 내 안의 온갖 더러움마저 받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무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프란치스코의 마음의 고향이자 그분이 돌아가신 뽀르치웅꿀라였다! 그곳으로 날 인도하신 길의 인도자 성모님과 당신께 바라면 늘 들어주시는 하느님, 올바로 청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두 분 성인의 이름을 딴 우리 아이들 프란치스코와 글라라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은혜를 청했다. 강론에서 신부님은 평신도의 영성에 관하여 최초로 가르치신 성 프란시스 드 살과 ‘단순함과 철저한 믿음의 길’을 말씀하셨다. △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성당 뒤켠, 프란치스코 성인이 정욕을 이기려고 가시밭을 뒹군 장미 정원에는 하느님의 자비로 가시 없는 장미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모서리에 벌레를 찬양하는 성인의 동상이 있다. 신앙이 무너지던 시대에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 구유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경배하셨으니, 그 뒤로 구유 경배가 일반화되었다. 성인은 가난하게 태어나셔서 돌아가신 주님을, ‘가난의 귀부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은데,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너희를 위한 표징이라고 루가 복음은 가르치는데, 우리는 대부분 그런 무력한 표징이 싫다. 나중에 본 바티칸 광장의 구유 역시 너무나 화려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의 장미 정원 △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하던 동굴 △ 프란치스코 성지 성인과 열두 형제들이 첫 공동체 생활을 하던 리보토르토. 그리고 ‘내 쓰러져 가는 교회를 세우라’는 첫 부름을 받고 수리하신, 그리고 글라라 성녀가 살다 돌아가신 다미아노 성당은 작은 노란 수선화와 딸기, 로즈마리로 아름다웠다. 성녀가 사셨던 공동침실이나 성가대석은 검소하고 소박했다. 성녀의 전기에 드러난 여러 일화처럼, 원장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셨지만, 원칙에 관한 한 엄격하여 프란치스코 생전에 변질되기 시작한 ‘가난의 귀부인’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있었고, 작은 형제회, 카푸친, 꼰벤뚜알로 분열된 프란치스코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어머니의 힘이다. 글라라 대성당으로 옮겨진 다미아노 십자가를 보고 떠오른 생각 하나-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성당에서 며칠이고 자면 십자가가 말씀하신다.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 리보토르토 움막 성당 △ 성 다미아노 성당 △ 성 다미아노 성당 앞길 당 △ 글라라 성녀의 공동 침실 △ 성체를 안은 글라라 성녀 상 △ 글라라 수도회 정원 죠토가 그린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벽화들 중 ‘순명’에는 거룩한 분별과 거룩한 겸손이 따른다. ‘잔꽃송이’에는 성인을 시험하려던 악마가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입니까’라고 계속 외치는 성인의 겸손 때문에 물러간 일화가 있다. 겸손으로 부제품에서 멈춘 성인은 설혹 사제 형제들이 잘못하더라도 그들을 존경하라고 권고하신다. “하느님의 종이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지 없는지를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천한 자로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작은 자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의 '영적 권고' 12). △ 성 프란치스코 생가 정원에 나오니, 요한과 프란치스코 중 누가 더 날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손가락으로 몰래 프란치스코를 가리키는 <석양의 성모님> 벽화가 너무 유쾌했다. 한편 <두 십자가>는 십자가를 지고 앞장 서시는 주님이 뒤따르는 성인에게 힘드냐고 물으시자, 주님께서 지고 가시니 저도 주님 따라서 갑니다라고 대답하는 그림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 성인의 십자가는 가난에 관해 자기와 다른 생각을 지녔던 엘리야를 비롯한 제자들이 아니었을 까. 이 십자가의 고통에서 이분의‘평화의 기도’와 ‘태양의 노래’가 나왔을 게다.
무척 추웠지만, 볼세나의 성체성혈 기적이 오늘날도 미사 중에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고, pregate continua ments 항구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친 오르비에토 대성당을 거쳐 보나벤투라 성인의 고향인 바뇨레죠로 갔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나 병에서 나은 어린 아기, 그 만남에서 Bona ventura 오 좋은 행운이여!란 이름을 받고 프란치스코에 입회하여 십자가를 지혜의 샘으로 여긴 너무도 겸손한 세라핌적 박사가 되었다. 남성의류 브랜드 이름인 ventura는 행운이란 뜻이다. 위의 스승과 제자의 만남처럼, 운명이 바뀌는 만남들이 있다. 소위 惡緣과 佳緣, 과연 너는 다른 이들에게 어느 쪽이었는가를 되돌아보면 늘 회한이 남지만,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는 말씀에 기대어 기도할 뿐이다. 다음에 들른 치비타는 시멘트 다리로 연결되는 육지섬으로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우리나라 같으면 이미 유원지로 바뀌었을 게다. 땅에 관한 한 여유로운 이 민족은 이걸 그대로 보존한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 만난 노을은 그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이 色을 보고 자랐기에 그림 <천지창조>의 그 色이 나오지 않았을까. 밀라노 등 대도시 상점에서 본 옷과 머플러, 유리 세공품들의 현란한 色들! 그냥 펼쳐도 패션이다. 이에 비해 黃靑白赤黑의 오방색을 전통색으로 지닌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에 의존하여 힘겹게 짜내야 한다. △ 오르비에토 대성당
△ 오르비에토 도자기 가게
△ 성 보나벤투라 상(바뇨레죠)
△ 치비타
△ 치비타의 옛 주교좌 성당
△ 성 보나벤투라 생가 로마의 아침 식사에서 일어난 해프닝! 너무도 친절한? 웨이터의 서비스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러한 이탈리아 남자의 다정한 표현에 반해서 여행 온 독일 여자나 일본 여자들이 그냥 눌러 앉는다고 전혜린이 썼던가? 무뚝뚝한 한국 남자를 생각하면 한국 여자도 한몫 단단히 했을텐데, 다행히도 옛날엔 가난해서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가 가정을 소중히 여기기에, 결혼 링을 낀 여자에겐 접근하지 않는 매너도 있다니... 만자레/먹고, 칸타레/노래하며, 아마레/사랑하는 나폴리. 정부에 대한 분풀이로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쓰레기조차 자원화하는 독일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격언, ‘가능하면 일하지 말고 살며, 일해야 한다면 남이 하도록 하라’. 네모 속에 갇힌 듯한 북부와는 달리 정겹다. 세상에는 나사 빠진 이들도 있어야 구색이 맞고 제대로 굴러가는 법. 다만 남편이 사랑하는 예로니모 성인의 두개골이 액화 기적을 일으키는 예로니모 대성당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나중에 로마에서 유해를 볼 수 있었다. △ 나폴리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사라진 도시 폼페이. 폐허가 된 신전들, 이중 스팀 장치와 수증기가 흘러내리도록 아치형 천장을 만든 목욕탕을 보면서 현대의 발전이란 과거의 것들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사르를 뽑으라는 선거 유세 벽화들은 그동안 지나쳐 온 이탈리아 도시들의 선거 벽보를 연상시킨다. 위조 동전 감지기를 설치한 스탠드 바, 무엇보다 루파나르(사창가)에 그려진 갖가지 춘화도를 보니, 인간이란 정말 거기서 거기구나 싶다. 포지션에 따라 메뉴를 고르는 메뉴판이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처참했다. 돈으로 여자를 사고 팔기 때문일까? 인도의 춘화는 조각이어서 표현이 더 적나라하지만, 종교적 의미를 지니기에 처참한 느낌은 없는데 말이다. 돈주머니와 자신의 남근을 저울질하는 베티의 집, 남편이 그랜저를 몰기 시작하면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니라는 말처럼, 예나 지금이나 돈=남성이다. 노천극장에서 오전에 배운 ‘산타 루치아’를 불렀다. 자매보다는 형제가 부르자 공명이 극장 전체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남자가 뱃심이 더 좋아서인가? 전설적인 테너, 카루소가 뱃심만으로 피아노를 움직였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老子의 道德經에는 ‘마음을 비우고 배를 實하게 하며, 뜻(志)을 약하게 하고 뼈를 튼튼히 하라’는 구절이 있다. 마음이나 의지라는게 하루에도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표리부동한지, 그러니 뼛속 깊이 새겨진 체험과 뱃심만 믿을 뿐. 그런데 그 뱃심, 요즘말로 내공을 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마에서 떨어진 물로 패인 자국, 공중우물의 손자국들에서 시간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지막 피신왔던 정원에서 숨진 주검 중에 어린이들의 화석이 보였다.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저 생때 같은 어린것들! 전세계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학대받는 1순위는 늘 아이들이다. 폼페이 신도시 로사리오 대성당에서 아이들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평화의 기도인 묵주기도는 언제나 가정의 기도이며, 함께 기도하는 가정은 하나가 된다” (요한 바오로 2세). △ 폼페이 유적지 △ 로마 공회장(폼페이) △ 아폴로 신전(폼페이) △ 폼페이에서 바라 본 베수비오 화산 △ 목용탕(폼페이) △ 폼페이 신도시 로사리오 대성당 종탑에서 운해로 둘러 싸인 눈덮힌 돌산, 몬테 카시노로 올라 가는 길, 축대와 그물망, 잔디, 나무 들에 모두 사람 손길이 꼼꼼이 닿았다. 멀리 보이는 폴란드 군인 묘지가 십자가 모양이다. 이차 세계대전 클릭 사령관의 폭격으로 중앙제단만 남았다고 한다. 무너지는 수도원을 보고 베네딕노 성인이 눈물 짓는 그림이 있는데, 사실 베네딕토 성인은 환시 중에 이민족의 침입으로 수도원이 무너지는 광경을 미리 보셨고, 수도원 건물은 무너지지만 사람은 살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으셨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사람에 의해 지속되고 쇄신되는 창설자의 카리스마이다. 작년 교부학 시간에 <베네딕토 규칙서>와 <베네딕토 전기>를 읽고 리포트를 10쪽이나 썼으니, 이분의 성지가 정겨울 수밖에! 평생직장을 기대할 수 없고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옮겨 다니는 신 유목민nomad 사회인 현대에 定住를, 일 중독증 사회에서 ‘일하며 기도하라’는 기도와 노동의 정신, 그리고 남북, 동서로 정치와 종교가 양 극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중용과 형제애를 귀하게 여겼던 성인의 가르침은 너무도 중요하다.
△ 베네딕도 수도원
△ 성 베네딕토 와 성녀 스콜라스티카 상 △ 성 베네딕토 수도원 지하무덤 그런데 여기 미사는 주일 미사이기에 이탈리어로 진행되었다. 아는 미사 순서를 뒤쫓아 가느라 정신이 없었고, 긴 강론에는 가끔 들리는 인명과 지명으로 그 내용을 상상해 보았다. 이렇게 답답한데, 60년대 중반까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평생 라틴어 미사만 드렸는데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니, 놀랍다. 뭔가 부족해야, 있는 게 당연하지 않고 고마운 법. 새삼 라틴어 미사에서 자국어 미사로 바꿔 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고맙다. △ 성 베네딕토 수도원 성당 사실 몬테카시노 대성당보다는 다음날 방문한 수비아꼬에서 성인의 향기가 더 풍겼다. 사크로 수팩코(거룩한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수도원. 오죽하면 성인께서 ‘절벽아 멈춰라. 내 아들들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기도를 드렸을까. 목동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던 곳, 절벽의 은둔소에서 성인께 親口하니, 프란치스코의 에레모 은둔소를 시간 때문에 못 간 게 새삼 아쉽다.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였을텐데... 수비아코엔 오상을 받기 전에 이곳을 방문한 프란치스코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베네딕토는 어떤 의미에서 프란치스코의 모델이었다. 정욕에 괴로워하는 베네딕토와 정욕에서 해방되는 베네딕토를 그린 보티첼리의 그림처럼, 베네딕토가 정욕과 싸운 장미밭이 있는데, 이곳 장미에는 가시가 달렸다. 프란치스코에게만 장미 가시를 없애 주셨으니 하느님도 불공평하시다고? 쓸데없는 상상 하나; 베네딕토 성인 때는 하느님도 첫 경험이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셨는데, 프란치스코 경우엔 정신을 차리시고 장미 가시를 없애주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도 우리 인간에 맞추어 성숙하신다! △ 성 베네딕토 은둔소(수비아코) △ 성 베네딕토의 장미밭과 벽화 △ 성 베네딕토 은둔소 내 성당 △ 성 프란치스코 벽화
△ 감옥에 갇힌 마귀 벽화 성인 때문에 감옥에 갇힌 마귀의 형상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베네딕토 성인의 전기와 일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오로 성인의 그림이 뭉클했다. 물에 빠진 플라치도 성인을 구하라는 스승의 명령에 즉시 ‘예’라고 순명했기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내 기본 성향은 옳지 않으면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기에,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에게 부당함을 지적해서 문제아가 되었고, 교회 역시 성당 어른들의 부당함을 보고 고1 때 뛰쳐나와 10년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을 변화시킨 계기가 성서모임 조 마오로 수녀와의 만남이었다. 수녀님과 만나고 말씀과 만나면서 ‘순명’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소위 파뿌리를 거꾸로 심으라는 명령에도 예할 수 있었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한 오랜 본당 활동이 불가능했으리라. 새삼 나를 이만큼이나마 하느님 자녀로 만드신 어른들이 고맙다.
사랑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고향 아퀴노. “이기주의의 어둠은 철저한 겸손의 빛으로만 걷힐 수 있다”는 간디의 말처럼, 황제와 교황이 전쟁을 벌이고 도시가 부흥하며, 아랍에서 새로운 사조가 밀려오고, 청빈운동과 탁발수도회 등 새로운 신앙운동이 일어나던 혼란스러운 중세의 전환기에, 겸손한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 포용성의 기저에는 진리에의 결단- 베네딕토회에 남아서 한 자리 차지하길 원했던 가족들의 압력에 맞서서 기성세대에는 미친 짓으로 보였던 도미니코 탁발 수도회를 선택하였던-이 있었다. 논쟁의 한복판에서 평생 떠돌이로 산 그의 삶. 그럼에도 반대의 표적이었던 시절에 쓴 <존재와 본질>이 수도원 골방의 평화 그 자체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처럼 고통스러운 쟁기를 끌고 밭을 가는 소의 한없이 선량하고 깊은 커다란 눈이라고 할까?
△ 아퀴노 대성당
△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집 겸손한 자만이 참으로 힘있게 저 넓은 세상을 품을 수 있다. 평생의 역작인 <신학대전> 을 지푸라기처럼 여겼던 신적인 겸손, 그분이 시성될 수 있었던 기적의 표징이 고작 청어 몇 마리였다. <신학대전>이 모든 신학생의 ‘공공의 적’이지만, 그분의 ‘성체 찬미가’가 모든 평신도의 기쁨의 샘이 되는 지금의 현실과도 들어맞는다. 겸손과 진리 위에서 토마스는 기존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신앙과 이상을 강조한 나머지 이성과 현실을 희생)가 이단시하던, 경험할 수 있는 현실 세계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받아들여 복음적 현실주의로 종합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새가 양쪽 날개로 날듯이, 드디어 우리 교회 역시 ‘신앙과 이성’을 결합할 수 있었다. 결코 현실의 당면 문제나 논쟁을 거부하지 않은,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대화로 풀어 나간 토마스의 개방성을 모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세계와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토마스 철학을 칭찬하며 현대 철학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하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역할을 강조하셨다(자료집이 너무 방대하다고 제게 토마스를 물어보신 언니,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는데 어렵네요)
신학원 1학년 내내 이 양반의 책과 씨름했으니 고생한 만큼 정이 들었고, 무엇보다 토미즘은 고루하다는 내 선입견이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성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학점 짜다는 이재룡 신부님께 고득점을 받았으니, 사랑하는 제자가 성인의 심장 앞에서 사진 한 방 박아 보여드리는 게 예의이지 싶은데, 안타깝게도 사진기가 없다. 그래서 무리한 욕심을 부렸다. 개인적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증거로 사람들을 굴비처럼 엮었던 80년대를 지나면서 내 귀중한 추억들이 낯선 사람들 앞에서 갈가리 찢겨나간 처참한 기억 때문에, 남들과 사진을 찍지 않았다. 작년 성모님 성지순례 사진도 거의 없다. 그런데 신학원 우리 반들이 아무 때나 사진기를 들이대면서 이런 내 사진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순례에서 너무 많이 자유로워졌다. 감사드린다.
모든 길은 로마로! 갈리스도 카타콤바, 자료집에 너무도 자세하고 핵심적으로 정리되었기에 더 할 말 없음! 특히 카타콤바의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 성사 본위, 사회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성경적 영성, 인간을 변화시키는 영성이자 침묵의 영성으로 정리해 주신 세레나 가이드님, 최고! “각자가 낸 봉헌금으로 죽은 이면 누구나 거기 묻힐 수 있었습니다. 묘 자리 하나 매입하고 봉장할 경비마저 감당 못하는 정말 없는 사람들도 거기 묻힐 수 있었습니다” 라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연설은 현재의 우리 납골당 사태를 새롭게 보게 한다. 납골당을 짓는 성당의 문제는 돈이다. 한 기당 수백만 원이 넘으니, 정말 가난한 사람은 성당 납골당과 무관하다. 교통문제를 야기하면서 납골당 판매금으로 성당 신축이나 교구시설을 짓는다면 지역주민의 입장은? 카타콤바의 연대감과 집단적인 애덕이 그립다.
△ 카타콤바(푸른 들판 밑의 무덤)
△ 성 칼리스토 카타콤바에서 바라본 하늘 성 바오로 대성당. 서간문을 읽을수록 바오로 성인의 열정과 안타까움이 절실해진다. 그분의 기념성당이다. 그리스/터키를 다녀오면, 지금 에어컨 빵빵한 벤츠 버스를 타고 다녀도 힘든데, 끔찍한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선교하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다빈치 코드> 등 픽션에 등장하는 장면, 이곳의 40개 대리석 기둥 위에 265명의 교황 초상이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는데, 두 곳이 비어 있다. 한 곳을 베네딕토 16세가 채웠으니, 이제 마지막 교황에, final이 다가온다고 유언비어가 떠도는데, 제발 빨리 보수공사하시어 최소한 100자리 늘려줘요! △ 성 바오로 대성당 상층 부분 △ 성 바오로 대성당 정면 입구 △ 성 바오로 상 △ 성 루카 상 바오로 참수터에서 바오로 사도의 목이 세 번 구른 자리마다 솟았다는 ‘세 개의 분수’의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십자 구멍에 귀 기울였다. 들리는 것은 위에서 나는 소리의 여린 메아리이다. 일단 밖의 소리가 조용해져야 내 안의 시끌법적한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지나면 안의 소리도 잠잠해진다. 열왕기 상권 19장의 크고 강한 바람, 지진과 불이 차례로 지나간 뒤에 들리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엘리야 내면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소리이다. 땅에 엎드린 동작 자체가 낮은 자리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듣겠다는 자세이다. 이해한다는 단어 역시 under/stand 아래에 서다는 뜻이니, 뭐든지 가이드가 해보라는 대로 할 일이다.
저녁에 찾아간 계시의 성모 마리아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개신교 신자 브루노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을 기념한 곳으로, 묵주와 십자가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니 죄인들과 무신론자들의 회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매일 드리는 묵주기도는 내 아들 예수의 심장에 박히는 금화살이다.” 꽤 많은 신자들이 평일인데도 열심히 미사참례하고 묵주기도 드리는 모습, 하루에 미사 2대라니! 서울에선 지구 성당 빼놓고는 언제부터인가 하루 미사 한 대, 그것도 시간은 지그재그이다. △ 성모 마리아 성당 우리 영혼의 本家 바티칸!
전 날 밤 베드로 광장에 갔다. 한가운데의 오벨리스크가 눈에 거슬렸다. 저 문화재도 반환해야 되지 않니? 나중에 베드로 사도가 처형당한 현장에 있었기에 식스토 교황이 증인으로 세웠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역시 한가운데는 아니지 싶다. 바티칸의 최고의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구유가 전시되었는데, 너무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구유 경배를 시작하신 이유는 ‘가난의 정신’을 교회가 잊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식의 구유라면 전혀 가난하지 않다. 바티칸이 실제로 가난할 수는 없지만, 상징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아귀가 안 맞은 것 같은 느낌을 UP시키려고 많이 웃었는데, 그날 따라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지 경건한 성지와 안 어울렸다. 호텔 방에서 여러 생각이 오갔다. 경건함은 보통 엄숙함으로 통한다. 그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라고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자세히 보면, 신발이 표상하는 겉치레를 넘어서 아무런 꾸밈 없이 맨발로 하느님을 만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아직도 내적으로는 유교 문화권에 속하기에, 온통 축제 분위기인 아프리카나 필리핀의 미사를 보면 신기하다. 다른 한편 모든 종교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 엄숙한 형식이나 제도는 신성을 담는 그릇이기에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어떻게 중용을 살아갈 수 있나? 여러 생각으로 어수선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다시 베드로 광장에 갔다. 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새벽 미사에 참례하느라 종종대는 순례단, 출근하는 신부님들. 밤과는 달리 몸도 개운하고 정신도 맑다. 이래서 새벽은 좋은 것이다. 어떤 스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길, 옆에 있는 형제가 그리스도로 보일 때 새벽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단다. 이처럼 눈과 마음에 거슬리는 것들이 사라지고 사람이 순해지니 저 높이 계시는 분도 ‘보시니 좋았다’.
다음 날 새벽 베드로 사도 무덤 경당에서의 미사! 여기에 왔다는 사실 하나로 압도되어서 그냥 멍했다. 그리고 박물관, 일찍 왔구나 싶었는데, 벌써 관광객 물결이다. 그래서인지 입구에 있는 현대 조각가 반지의 <희망의 문턱을 넘어서> 등은 마음까지 와닿지 않는다. 선교 박물관의 한국관은 차라리 없애는 게 낫겠다. 한국을 巫神圖와 탈 몇 개가 대표하다니, 화려하고 풍요로운 중국과 일본관에 비해 섭섭하다. ‘몸의 신학의 성전’이라고 요한 바오로 2세가 부르셨다는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하느님의 손과 맞닿을 듯한 아담의 손, 인간 영성이 탁월할 때 신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표현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늘 2% 부족한 인간 실존은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심어진 영원을 향한 그리움 때문인가? 그래서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가라앉지 못한다”고 성 아오스딩이 말씀하셨나? <천지창조>에 마음을 주고나니, 다음에 본 <최후의 심판>에는 눈만 간다. 묵주로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부분만 인상적일 뿐. 미켈란젤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떠나 보낸 60살부터 6년간 그렸기에, ‘낳고 사랑하다 죽는’ 인생의 이야기를 훨씬 더 원숙하게 그렸을텐데, 아직 그 나이에 못 미쳐서인가? 아니면 교회로 돌아온 20대에 알게 된 자비하신 하느님, 그때부터 내게 심판은 자비와 순수 자체이신 예수님 앞에 선 내 모습이 너무도 더러워 나 스스로 뒷걸음치는 모습이다. 작년 종말론 시간에 현대 신학자들의 이론이 비슷해서 놀랐다. △ 바티칸 박물관 아폴로 상, 큐피드, 다프네, 머큐리, 토르소 등, 벨베데레의 뜰에서 본 로마 그리스의 조각상들은 교회가 그동안 경시해 온 인간의 몸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에 나타난 인간은 몸과 정신, 영혼이 어우러져 하나를 이루는데도,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탄, 세상, 육체를 三仇(세 가지 원수)로 여겨 왔다. 이와 반대로 현대는 몸을 과다히 숭배하니, 이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여러 조각 중 특히 <라오콘 군상>에 마음이 끌렸다. 트로이 목마에 숨은 그리스군의 간계를 알아 보고 저지하는 라오콘 부자를 바다에서 달려온 뱀이 휘감아 죽이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포착하여 사실적으로 조각했다. 이 父子의 고통 뒤에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고 吉兆만을 보고 싶기에 너무도 뻔한 그리스 첩자의 거짓말에 속는 군중심리-바로 지금 우리 모습이 숨어 있다. 무엇보다 트로이의 멸망은 신들의 세계에서 이미 결정난 사항이기에, 그 결정에 반대하는 라오콘은 사라져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말하는 자의 보편적 운명이다. 인간은 진실 100%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 진실에 최소한 10% 정도 거짓이라는 당의정을 입혀야 받아들일 수 있다. 10%도 너무 높은 수치이다. 2-30%? 그래서 100% 진실을 말하는 자는 오히려 거짓말하는 자로 몰려 그 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6.25 전쟁을 통하여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날카롭게 묘사한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를 읽었을 때의 당혹감이 겹쳐졌다. 진실을 말할 때는 듣는 사람 수준을 고려하여 진실을 더하고 빼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니라. 그래도 우리 주님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다음은 라파엘로의 방, 엘리오도르의 방, 서명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의 제자들 작품까지 모두 라파엘로 일색이다. 이들을 보면서 라파엘로와 죠토는 확실히 마니아가 다르겠구나 싶다. 서명의 방에서 본 라파엘로의 <眞善美>, 진리 중 ‘성사에 관한 토론’은 신학의 진리이고, ‘아테네 학당’은 이성의 진리이다. 신앙과 이성의 양 날개! 善을 착함뿐 아니라 옳은 것, 정의로운 것으로 보아서 ‘법’으로 묘사한 점이 특이했는데, 그건 최소한의 규범조차 되지 못하고 온갖 불법과 편법이 난무한 우리나라 법의 역사가 불행했기에, 선함은 늘 법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토라는 말씀, 계명, 법의 여러 이미지이다. 美를 묘사한 아폴로와 뮤즈의 신들은 眞에 비하면 평범했는데, 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조차 美보다는 眞을 더 잘 표현했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 美의 진정한 대변인은 이 작품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아담의 창조였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그분의 예술품이다. 시칠리 섬과 다미아노 성당의 노란 들꽃들의 그 아름다움, 그리도 눈부셨던 노을과 구름의 세계. 어제, 아니 바로 전과 같은 작품이 없다. 매순간 새롭게 표현하시는 예술가 하느님! 그분의 중요한 속성이 바로 아름다움의 표현이기에,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품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그분을 알 수 있다. 특히 당신 표현의 절정인 인간!(따지고 보면 더 늦게 창조된 여자가 하느님의 최고 작품이다) 그동안 여러 성당의 예술품들을 보면서 스쳤던 ‘미대생도 아닌데 믿는 이들이 웬 작품 감상?’ 이라는 의문이 해결되었다. ‘현대 종교예술의 방’은 외부 통로로 지나쳐야 했기에 눈만 흘겼지만, 파치니의 가시덤불 모양의 청동조각, 마르티니의 Assumzion승천 1925, 안젤로 비안치니의 작품이 좋았기에 한국에 돌아와서 찾아보자고 이름만 적었다.
새벽 미사에서 눈도장 찍은 베드로 대성당. 베르니니의 거대한 청동작품, 나선형 기둥들... 신비주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루미는 ‘그대 앞으로 오는 이야기에 만족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라’고 했지만, 좋은 것들도 한꺼번에 보면 질리는가. 박물관을 다녀온 뒤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냥 좋구나 싶다. 베드로 동상의 발에 親口하라면 하고... 컴퓨터 용량 초과!라고 머리에서 삑삑 신호음이 울린다. 그래도 미켈란젤로가 고작 24세에 완성한 <피에타>는 눈에 들어왔다. 그리스도교적 고통과 죽음을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포용했기에, 깔끔하고 정제된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정말 이렇게 정갈하게 죽고 싶다. 무심하게 훌쩍 떠나고 싶은데... 그러나 생명에 집착하는 것도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본성이기에, 언젠가 내 차례가 오면 그때 문제이고, 지금 현재를 잘 살자. 카르페 디엠! 젊은 마리아가 특이하다. 일찍 죽은 자기 어머니를 젊은 마리아로 영원히 남겼다니, 작가가 죽음에 민감한 젊은 나이여서였나? 선후배, 친척, 성당에서의 숱한 연도, 그리고 아버지와 자식, 나도 많이 보냈구나. 여러 차례 죽음을 겪으면 죽음에도 일정 정도 무감해진다. 이건 별로 좋지 않다. 모든 생명과 죽음은 일회적이기에 충분히 기뻐하고 슬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 성 베드로 대성당 △ 성 베드로 대성당 왼편과 교황 집무실 △ 성 베드로 대성당 △ 성 베드로 광장과 근위병 그래서인지 성당 문에 필이 꽂혔는데, 왼쪽부터 차례로 교황님의 운구차가 나간다는 죽음의 문, 선악의 문, 중앙문, 칠 성사의 문이다. 우리는 칠 성사의 문으로 들어가서 선악의 문으로 나왔나? 모든 믿는 이에게 성사는 은총의 문이기에 그럴듯하다. 중앙 문 아래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었는데, 그 반대편에는 물 위를 걸어오는 베드로 벽화가 있다. 의심이 들자마자 물에 빠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뒤 닭이 울자 밖으로 나와 울었다. 이 베드로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중앙문의 베드로는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요한 23세는 이 중앙문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활짝 여셨다. 그 양반 비디오를 보면, 잠 없는 노친네가 불 꺼진 베드로 광장 한 귀퉁이에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밤새 고민하시다가 세상과의 대화이자 젊음과의 대화인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결심하셨다니, 정말 품이 넓은 할아버지시다. 샤를르 드 푸꼬는 주변의 아랍인들이 언제나 들어올 수 있도록 사막 은둔소의 문을 없앴지만, 경계를 표시하는 상징으로 벽돌 하나를 문 자리에 놓았다. 다른 이들을, 세상을 받아들이면서도 부모 자식 간에도 필요한 경계인 벽돌 한 장!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블라인드 친 지금의 교회와 나는 엇비슷하지 않나? 지금 수준도 벅차서 닫았으면 싶은데, 어떻게 활짝 열지?(이 후기 역시 문 뒤에서 숨으려는 나, ‘블라인드 걷고 환한 세상으로 나와요’라고 격려하는 나 사이의 투쟁기랍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 23세는 정말 용기 있는 분이셨다. 그분 안에 간직한 평화가 그 용기의 근원이란다. △ 성 베드로 대성당 죽음의 문 어머니 교회, 우두머리 교회인 라테란 성당, <1300년 보니파시오 8세가 첫 번째 성년을 선포하는 장면>을 그린 죠토의 작품이 반갑다. 聖年이란 모든 빚이 탕감되는 대희년인데, 사실 이대로 행해진 적은 유다 역사에서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상징의 의미는 크다. 성년이 처음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중세 전환기의 어지러운 시대상이 엿보인다. 돈 주머니를 밟고서 복음을 쓰는 마태오 사가. 떨어질 것 같은 동전이 인상적이다. △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성 계단 성당. 무릎을 꿇고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계단들(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을 때 오르내리시며 밟으셨던)을 오르자 정신이 났다. 지금 하느님께 무릎 꿇는 신앙의 은총을 주신 것처럼 사람들에도 무릎 꿇는 겸손을 주십시오. 앞 사람이 빨리 가면 나도 빨라졌고, 앞에서 느리면 뒤따라서 멈췄다.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앞에서 가니 저도 그 뒤를 따라 가는 긴 순례 행렬, 우리는 공동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계단을 오르다가 진짜 예수님이 밟으셨나 의심이 들어 내려왔다고 하는데, 고지식하게도 그는 종교적 상징이 가지는 힘을 너무나 몰랐다. ‘오직 성서!’ 그보다 더 꽉 막힌 개신교 후배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성사 등 모든 상징적인 요소를 버리자, 지금은 뼈대만 남아 뼈끼리 닿으니 삐꺽거린다. 그러나 감각적 동물인 인간의 조건상 무언가 살을 붙일 수밖에 없는데, 그 살이 교파마다 저마다 다르니. 개신교 목사의 아들인 유명한 심리학자 칼 융은 정신분석 과정에서 상징의 의미와 그 놀라운 치료효과를 본 뒤에 개신교가 버린 상징들을 너무 안타까워했다.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 예수님 오른쪽에 박힌 우도의 십자가(나라를 훔친 도둑을영웅이라고 칭송하는데, 이 양반은 한순간에 一國보다 더한 天國을 훔쳤으니 최고수이다. 신비주의자 요수아 라삐의 한 말씀; 도둑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1. 밤 늦도록까지 일한다 2. 자신이 목표한 일을 하룻밤에 끝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다시 도전한다 3.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든 행동을 자기 일처럼 느낀다 4.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건다 5. 아주 값진 물건에 집착하지 않고 돈과 바꿀 줄 안다 6. 시련과 위기를 견뎌낸다 7.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안다) INRI라고 적힌 예수님의 명패,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조각과 십자가를 박은 대못을 보았다.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에서 찾아온 예수님의 유품들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영국의 신비주의 시인 블레이크가 노래했지만, 그럴 깜냥이 못 되는 내게는 성인들의 유해처럼 여러 부분으로 쪼개졌기에 작은 조각에 불과한 주님의 십자가는 현실감이 덜했고, 오히려 우도의 십자가, 특히 대못이 섬찟했다. △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당 베들레헴에서 가져 온 말 구유가 있는 눈(雪)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바닥의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에서 가져 왔던 금으로 입힌 화려한 천장.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치신 예로니모 성인의 무덤. 나폴리에서는 못내 그리웠는데, 로마에서는 우선순위가 밀려서인지 덤덤했다. 사람을 사귈 때 연때가 맞아야 하듯이 성인 공경에도 연때가 필요한가. 緣은 있으되 때가 늦었나보다. 그리고 이쁜 성모상이 아니라 아주 강인한 어머니라는 느낌을 주는 평화의 모후(Ave Regina Pacis)' 조각상. ‘평화의 모후'라는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인류를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는 망명자, 포로, 부상자, 억류자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유럽 문제 해결을 위해 각국이 협상 테이블에 모일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였기에, 그의 박애정신에 감탄한 터키 회교도들이 이스탄불에 교황의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 성모 마리아 대성당 카푸친 수도회의 해골성당. 번화가인 베네토 거리 지하에 있는 수도자들 묘지이다. 수도자들의 해골과 뼈들로 만든 작품이 들려주는 메시지, “여러분은 나의 과거이고, 나는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베네토 거리에서 열심히 쇼핑할 때, 지하에 있는 이 작품들을 생각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래도 카르페 디엠? 일종의 죽음 체험이었다. △ 해골 성당 스페인 광장을 거쳐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트레비 분수, 한 번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고, 두 번은 로마에서 사랑하고, 세 번은 결혼하고 네 번은 이혼한단다(이래도 네 번째 동전을 던지는 간 큰 사람이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두세 번 던지고 싶었지만 그래도 현실성 있는 한 번을 택했다는데, 난 동전이 없어서 그나마 땡쳤다. 여기 모인 동전들로 1년에 10억을 유니세프에 기증한다는데, 유니세프 활동을 하면서 곱게 늙은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생각난다. △ 트레비 분수 밤에 로마의 공회당과 신전들의 폐허를 보러 갔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집에 잘 정리되었다. 아그리젠토에서 환한 대낮에 푸른 하늘을 전경으로, 넓게 펼쳐진 구릉지대와 저 멀리 사람 사는 도시가 배경인 신전들의 폐허를 보았다면, 그래서 전반적인 인상이 明明白白했다면, 이곳 로마의 폐허는 어둠이 후광처럼 드리웠다. 나는 빼곡한 유적지보다 폐허로 남은 유적지를 좋아한다. 그런 곳에선 가슴이 뚫리고 제대로 숨이 쉬어진다. 그런데 밤의 로마 유적지는 신비와 유혹이 뒤섞인 비밀의 정원처럼 마음으로 다가서는 게 두려웠다. 뭔가 혼란스럽다.
보통 순례 도중에 여러 차례 어둠과 만난다고 한다. 그 어둠의 정체를 똑바로 바라볼 때, 어둠은 축복으로 바뀐다. 자신 안에 숨은 또다른 자신에게로 가는 길, 자신의 영혼과 재결합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둠은 혼자보다는 관계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그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니라, 그대 신발에 든 모래 알갱이”라는 아랍의 격언처럼, 순례에서는 평소에는 지나쳤을 사소한 것들이 큰 무게를 지닌다. 순례 도중 나와 남에게서 보았던 여러 치사스런 모습들! 사실 다른 이의 창자 속은 냄새를 풍기기에 금방 보이지만, 내 창자 속은 쉽지 않다. 그래서 어쩌다 내 창자 속이 보일 때, 그 역겨움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서울에 돌아와서 지도수녀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자, 그게 앞으로 내가 만나고 들어야 할 사람들의 마음이란다. 내 창자 속에 온갖 것이 들었어도 변함없는 ‘나’이듯, 다른 이 역시 마찬가지다(저처럼 어둠을 만나신 분은 걱정하지 마세요. 어둠 자체가 순례의 은총이랍니다. 첫 순례에선 저도 이런 은총을 받지 못했어요. 다만 그 은총을 곰곰이 생각하시어 자기 것으로 만드시길! )
집으로 돌아가는 걸 몸이 먼저 알아채고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성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 베드로 성당에서 언제 다시 미사 드릴 수 있으랴 싶은데도 옆 경당에서 미사 드리는 소리 때문에 잘 집중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성당을 둘러 보고 열심히 일하시는 교황님께 마음으로 인사드린 뒤, 판테온을 거쳐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렀다.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과 로마에서 베드로 사도의 두 쇠사슬이 묶여 있고,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모세상과 창세기의 라헬, 레아상을 보았지만, 이미 마음이 들떠 집중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집중하기란 정말 어렵구나 싶어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인천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출발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건 뭘 생각해 보라는 싸인인가? 이번엔 급체한 옆자리 언니의 혈자리를 지압한 뒤 언니는 편하게 잠들었지만, 어제밤 잠 못 잔 뒤끝에 균형이 깨지면서 上氣가 일어났나보다. 고통스러운 밤, 그래도 좌석 뒷켠의 작은 창으로 해가 떠올랐다. 그리고 집에 오자 현관 바닥에 남편의 환영사가 붙어 있었다. 아, 집이다. 순례는 진정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순례 기간의 어록집; 집착이 악을 낳는다/ 인생에 만족은 없다. 하느님이 부르시면 언제나 바로 가야 한다/ 나와 남의 잘잘못보다 전체가 잘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순례는 나와 하느님의 단독 계산서. 함께 하는 이는 잠시 스쳐가는 만남일 뿐/ 인생은 하룻밤 머물다 갈 뿐이다. 아빌라의 데레사; 인생은 하룻밤 여인숙/ 미사는 민방위 훈련이 아니라 실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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