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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종욱 WHO사무총장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namsarang 2010. 11. 28. 20:58

[초대석]

 

이종욱 WHO사무총장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2010-11-26 03:00 2010-11-26 05:28

“남편 유산은 각계의 후원… 페루여성 자립 돕고 있죠”



25일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일명 이종욱기념재단)의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자료실에 들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가 남편의 흉상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부라키 여사는 흉상을 만져보며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사진 제공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페루 수도 리마 북쪽의 가난한 마을 카라바이유. 인구가 2000명 남짓 되는 이 빈민촌에서 일본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65)는 현지 여 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작은 손뜨개 공방을 운영한다. 15명의 마을 여성에게 뜨개질하는 법을 가르쳐 알파카 털로 목도리와 스웨터 모자 등을 뜨면 그걸 외국에 팔아서 수익금을 나눠주고 있다. 1인당 월수입은 60달러 정도.

남미의 벽촌에 살던 가부라키 여사가 25일 오후 서울대 의과대학 강단에 섰다. 공방의 최대 후원자이자 남편이었던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모교에서 의료구호단체 ‘메디피스’와 함께 마련한 초청 강연 자리다. 이 총장은 200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선출돼 ‘지구촌 질병 파수꾼’으로 봉사하다 2006년 5월 뇌중풍(뇌졸중)으로 별세했다.

“우리 공방으로선 최대 후원자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동안 공방 월세와 재료비를 남편이 남몰래 개인 돈으로 대줬거든요. 마을 사람들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도 남편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었죠. 돈 좀 보내달라고요.”

이날 강연에 앞서 본보와 인터뷰를 가진 가부라키 여사는 나직하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남편과의 추억을 더듬다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어느 날 TV에서 아프리카와 코소보 난민들을 보면서 ‘저기 가서 아기 기저귀라도 갈아주고 싶다’고 졸랐지요. 남편은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하다가 ‘레이코, 페루 갈 수 있게 됐어’ 하고 봉사할 곳을 주선해 줬어요.”

남편이 매년 30만7000km를 날아다니며 질병 퇴치와 기금 모금을 하는 동안 부인은 2002년 1월부터 한 해 8개월을 페루 빈민촌에 머물면서 공방을 운영하고 현지 여성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해왔다.

 

 1972년부터 5년간 경기 안양시 나자로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돌본 이후 26년 만에 다시 자원봉사자로 나선 아내를 남편은 적극적으로 외조했다. 월셋집에 살면서도 가부라키 여사가 “돈 보내달라”고 하면 수시로 개인 지갑을 열었다. 부인이 페루에 있는 동안 스위스 제네바에 혼자 남은 이 총장은 직접 밥해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면서 살았다.

“제가 집에 있을 땐 힘들게 집안일 하지 말고 도우미를 쓰라고 하셨는데…. 제가 곁에 있었더라면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까요. 퇴직하면 한국도 일본도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살자고 하셨죠.”

한국에선 가부라키 여사가, 일본에선 이 총장이 ‘외국인’이 되는 것이 싫어서 다른 곳을 찾고 있었는데, 이제 가부라키 여사의 터전은 페루가 됐다. 그리고 남편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내를 돕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제네바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한국인, 이 총장의 전기를 펴낸 출판사 등에서 기부금을 보내와 월세 걱정 없는 공방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새 공방은 지금 공방보다 더 커서 20명까지 일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죠. 저세상에 있는 남편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어요.”

‘나는 나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며 청혼을 거절하는 가부라키 여사를 ‘내가 고쳐주면 된다’며 설득했다는 이 총장. 평생을 남편에게 존중받으며 살았다는 가부라키 여사는 이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숨죽여 살던 여성들이 자존감을 되찾도록 돕고 있다. 이날 가부라키 여사의 강연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 이종욱 박사의 유산’이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