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이맛!]
쇠뼈 우려내면 설렁탕… 소 살코기 쓰면 곰탕… 미식가도 “맛 구별못해”
2010-11-26 03:00 | 2010-11-26 03:00 |
설렁탕과 곰탕
(1929년 발행 잡지 ‘별건곤’의 ‘경성 명물집’에서) 설렁탕과 곰탕은 어떻게 다른가. 곰탕집에 가면 설렁탕이 나오는 것 같고, 설렁탕집에 가면 ‘내가 지금 곰탕을 먹고 있는 것 아닌가’ 갸웃거린다. 둘 다 쇠고기나 그 뼈를 푹 곤 국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왜 이름이 각각일까. 왜 나이든 어르신들은 설렁탕집보다 곰탕집을 더 찾을까. 그렇다. 설렁탕과 곰탕은 엄연히 다르다. 설렁탕은 쇠뼈를 위주로 곤 것이다. 쇠뼈는 설렁탕의 아버지이다. 소의 네 다리뼈인 사골과 잡뼈를 주로 쓴다. 물론 허드레 고기와 내장도 일부분 넣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맛을 내기 위한 보조첨가물일 뿐이다. 쇠뼈는 뭉근한 불에 오랫동안 끓이면 뽀얀 물이 우러나온다. 골수(骨髓)에서 우유처럼 희뿌연 즙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에 쇠기름을 적당히 섞으면 고소하고 구수한 맛이 난다. 쇠기름은 콩팥 옆의 두태 등을 쓴다. 곰탕은 쇠뼈가 아니라 소의 살코기 위주로 오랫동안 곤 것이다. 소의 양지, 사태 등 특정 살코기와 내장, 일부 뼈(사골) 등으로 끓였다. 양지는 소 가슴에서 배 아래쪽에 이르는 살코기를 말한다. 사태는 소의 오금에 붙은 살이다. 곰탕은 주로 쇠고기 삶은 물이라 맑고 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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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은 왜 설렁탕일까. 국물에 ‘설렁설렁’ 밥을 말아 먹어서 그럴까? 아니면 뽀얀 국물 때문에 ‘설농탕(雪濃湯)’이라고 불려서 그럴까. 그것도 아니라면 몽골의 고깃국인 ‘슐루’가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렇게 굳어졌을까. 즉 ‘슐루→슐루탕→설렁탕’으로 변했다는 설 말이다.
또 있다.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조선 임금들은 해마다 선농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쓴 고기 뼈를 고아서 백성들에게 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선농단 제사는 숱하게 나오지만 그때 제사음식을 내렸다는 말은 단 한 구절도 없다.
곰탕은 왜 곰탕인가. 어떤 이는 왜 곰탕에 ‘곰’이 하나도 없느냐고 항변한다. 푸하하. ‘곰’은 ‘고음(膏飮)’과 같다. 고음은 ‘기름진 음식’이라는 뜻. ‘고(膏)’의 동사형은 ‘고다’이다. 즉 ‘푹 고아서 기름기가 많은 탕’인 것이다. 조선시대엔 곰탕이 아니라 ‘곰국’이라고 했다. ‘고음→곰→곰국→곰탕’으로 변한 것이다.
곰탕은 조선 양반들이 즐겼던 음식이다. 고춧가루나 채 썬 파, 소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간도 조선간장으로 맞췄고 맑은 국물을 선호했다. 쇠고기는 서민들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서민들은 양반들이 먹지 않는 쇠뼈를 이용해 설렁탕으로 먹을 수 있었다. 설렁탕은 서민들이 간단하게 뚝딱 거칠게 밥을 말아 먹었던 장국인 것이다. 입맛에 따라 매운 고춧가루나 마늘 등을 맘껏 넣어 먹었다. 아무데서나 큰 솥 걸고 국물 고아서 밥 말아 먹었다.
일제강점기 양반가에선 설렁탕을 멀리 했다. 맛은 있지만 백정들이 만든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상것들이 먹는 음식이라 양반 체면으로는 먹을 수 없다며 기피했다. 하지만 직접 설렁탕집에 가지는 못하지만 남몰래 배달시켜 먹었던 양반들이 수두룩했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곰탕집은 많다. 70여 년 역사의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뒤 하동관(02-776-5656)과 3대 100년 가까운 전남 나주곰탕 하얀집(061-333-4292)이 그렇다. 60년 역사의 서울 종로2가 영춘옥(02-765-4237), 경남 진주육거리곰탕(055-757-6969), 대구 원조현풍박소선할매집곰탕(053-615-1122), 서울 신림동 원조나주곰탕(02-886-9353) 등도 발길이 붐빈다.
설렁탕집은 단연 1904년에 문을 연 서울 종로 공평동의 이문설농탕(02-733-6526)이 눈에 띈다. 220인분의 가마솥이 어마어마하다. 양지와 사골 등 각종 부위를 넣고 24시간 고아서 손님상에 내놓는다. 날김치가 맛있는 신촌설렁탕(02-392-4044), 운전기사들이 많이 찾는 성동구 홍익진국설렁탕(02-2292-4700), 70년 역사의 서소문 잼배옥(02-755-8106), 청와대 부근의 백송(02-736-3565), 강남 신사역 부근의 영동설렁탕(02-543-4716), 마포 공덕동 양지설렁탕(02-716-8616), 중구 주교동 문화옥(02-2265-0322) 등이 이름났다. 체인점인 신선설농탕(청담동 02-548-3370)과 이남장(을지로2가 02-2267-4081), 봉희설렁탕(02-302-9754)도 만만치 않다.
곰탕이나 설렁탕이나 한우가 으뜸이다. 밑반찬인 김치와 깍두기도 맛있어야 한다. 깍두기는 아삭아삭 소리가 나야 한다. 시원하고 단맛이 나야 개운한 맛을 준다. 그 깍두기 맛을 못 잊어 식당을 찾는 사람도 있다.
오래된 곰탕집이나 설렁탕집은 그 경계가 명확하다. 소의 살코기가 주재료냐, 쇠뼈가 주재료냐가 확실하다. 하지만 요즘 신진 곰탕집이나 설렁탕집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설렁탕에 양지 안 쓰는 집 거의 없다. 주재료인 뼈가 부재료로 밀려나고 있다. 곰탕집에서도 쇠뼈를 점점 더 많이 쓰고 있다. 아예 곰탕과 설렁탕을 같이 취급하는 집도 있다. 맛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걸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 그래도 내 허기는 눈멀어/뼈만 남은 어머니를 이 세상에 넣어 끓이네요/뿌우옇게 뼛국물 우러날 때까지 끓이네요/저 세월 국수 면발로 풀어 후루룩 후루룩 들이키고 싶어 끓이네요//밤이면 꽃잎 스쳐 꿈속으로나 흘러가야 할 어머니/…뼛국물 우러나고 계시네요/세상의 식욕까지 꾹꾹 참으시며 우러나고 계시네요’ (김왕노의 ‘곰국을 끓이며’에서)
시인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지만 김왕노 시인의 노래 내용은 분명 곰국이 아니라 설렁탕이다. ‘뼛국물이 뽀얗게 우러나는’ 구절이 그렇다. ‘국수 면발’ 이미지도 그렇다. 요즘 설렁탕에 국수 면발을 넣는 집이 있다. 설렁탕에 국수를 넣으면 밀가루 냄새 때문에 사골에서 우러난 고소하고 구수한 뒷맛이 사라진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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