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
노무현과 손학규, 그리고 한미 FTA
노무현은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4년 북한의 핵에 대해 ‘자위적 수단’이라고 했다. 2006년엔 ‘선제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는 뜻의 말도 했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의 입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핵 성전, 핵 참화, 핵전쟁의 암운’ 같은 언설을 쏟아냈다. 남한이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핵 공격 위협까지 하는 것은 북핵이 전쟁도발 수단이요, 공격용임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통령 노무현은 결국 김정일 집단과 북핵에 대한 국민의 경계심을 무디게 만들었고, 북핵 옹호론까지 부채질했다. 또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조기환수를 고집해 안보 불안과 국민 부담을 키웠고, ‘반미면 어떠냐’며 동맹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우리 외교의 안전판에 구멍을 뚫었다.
이처럼 안보 면에서 나쁜 유산을 많이 남겼지만 노무현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2007년 4월 2일 협상 타결의 마지막 순간까지 대통령 노무현의 리더십은 빛났다.
우리 국민은 개방과 자유무역과 국제경쟁을 통해 세계에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한미 FTA는 이러한 대한민국과 미국이 새로운 시장을 상호 창출해 윈윈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이다. 장벽을 더 낮춘 시장을 교환함으로써 우리 기업·산업·경제의 체질과 글로벌 경쟁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 대중(對中) 교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상황에서 ‘중국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한미 FTA는 긴요하다.
反美대통령의 찬란한 성공유산
정치외교적 의미도 크다. FTA는 경제영역이지만 정치를 떠난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적 물적 상호진출을 확대 심화할수록 안보협력의 중요성도 커진다. 이로써 한미 동맹관계가 강화되면 북한을 포함한 주변국들에 대한 우리의 외교적 버팀목도 튼튼해질 것이다.
어느 한미 FTA 반대론자는 ‘뒤처진 나라가 앞선 나라와 자유무역을 하면 도태되기 쉽다’는 논리를 편다. 과거 개방 반대파가 ‘갑자기 시장을 열면 걸음마 단계의 우리 산업은 죽고 만다’며 엄포를 놓던 것이 연상된다.
섬유 전자 자동차 철강 조선에서 정보기술(IT)산업까지 한국이 처음부터 앞서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다.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가 소니를 추월할 것이라고 믿은 사람도 없었다. 현대자동차가 부실 기아차까지 끌어안았을 때, 세계 자동차산업 재편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걱정한 사람이 많았다. 40수년 전 박정희와 박태준이 포항종합제철을 세우겠다고 했을 때, 변형윤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은 ‘쇳물을 뽑은들 쓸 데가 어디 있느냐’며 극력 반대했다. 이들은 자동차산업도 안 된다고 했다. ‘기술종속, 시장종속, 종속국가’ 같은 그럴듯한 말로 위협하며 발목을 잡았다. 정주영이 배를 만들겠다며 외국에 돈 구하러 다닐 때는 ‘무모하다’는 냉소가 그의 뒷덜미를 때렸다.
정부와 기업이 경제학자들, 특히 좌파 학자들의 주장에 놀아났다면 지금 이 나라는 어떻게 돼 있을까. 맨발로 가시에 찔려가며, 물마시고 트림하는 국민이 여전히 넘쳐나지 않을까. 그런 것을 목가적(牧歌的)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수입시장은 아직도 세계의 20% 안팎인 최대 시장이다. 이 황금시장에 경쟁국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박차는 것이 우리 경제를 지키는 길이라고 하는 한미 FTA 반대론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명박 정부와 오바마 정부는 작년 12월 협정 일부를 수정했다. 우리가 자동차 분야에서 추가로 내준 것도 있지만, 국내 업계는 미국 부품시장 진출 확대에 더 기대를 건다. 양돈 제약 분야에서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총체적으로 2007년의 협정 기조를 유지했다. 관련 업계는 반기는데 객들만 나서서 수용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내가 노무현 지지세력이라면 한미 FTA 발효에 앞장서겠다. 그래서 한미 FTA를 노무현의 최대 치적으로 역사에 기록하겠다. 실제로 한미 FTA는 노무현의 업적이다.
親盧, 봉하 무덤에 훈장 바칠 기회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천정배 등 민주당 인사들은 작년 10월 봉하마을 노무현 묘소에 가서 유업을 받들겠다고 했다. 한미 FTA 발효를 주도하고, 그 효과를 앞당기는 것이 노무현의 유업을 완성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 억지 논리를 동원해 한미 FTA 비준을 한사코 방해한다면, 결과적으로 비준됐을 때 한미 FTA 성사의 공(功)을 이명박 정권에 헌납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타파한 서민 대통령’ 같은 막연한 이미지로 역사에 빛을 발하기는 어렵다. 손학규, 그리고 유시민 같은 친노 세력이 지하의 노무현에게 ‘한미 FTA를 이루어낸 대통령’이라는 찬란한 훈장을 바칠 기회를 놓친다면 그의 무덤을 찾아갈 자격이 없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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