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

수렵도(이진영)

namsarang 2011. 3. 25. 18:36

 

수렵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수렵도

                                                                                               글 / 이진영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에서

나는 고구려의 사내와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나무창을 들고

범의 뒤를 날쌔게 쫓아가고 있었고

나는 엽총을 든 채 그의 뒤를 숨차게 따르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무창으로 범을 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현대의 지식에 잘 숙달된 나에게는

총이 아니면 범는 잡을 수가 없는 짐승이었다.

또한 현대식 사냥은 짐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해

정확히 사격해야만 되는 것이었으며

사나운 짐승일수록 멀고 은밀한 곳에서 총을 겨누어야만

안전하고 노련한 사냥 방법이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더욱 힘차게 말(馬)을 달려

날쌔게 범의 뒤를 쫓아가 나무창을 던졌고,

그 때 눈발 속에 나부끼는 그의 뒷모습은

건강하고 튼튼한 한반도의 참모습.

숨을 할딱거리며 뒤따라온 나를 향해

고구려의 사내는 날쌔고 용감해야

사나운 짐승을 잡을 수가 있다고

또한 힘과 땀과 온몸으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사냥법이라고 웃으면서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현대의 지식에 깊숙히 물든 나의 머리뼈와 사냥상식을.

눈발 멎은 하늘을 향해 마음의 백마가 큰 소리로 울었을 때

고구려의 사내는 범가죽과 함께 나무창을 내밀며

사슴을 쫓아가보라고 말하였다.

몇 채의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 나이 등줄기가 축축해졌을 때

아, 범가죽 위에는 어느새 사내의 이름이 풋풋하게 돋아나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던 것을.

나의 나무창에도 온몸에도 땀과 힘이 푸르게 솟아나

한반도의 먼 힘줄기를 서서히 닮아가고 있던 것을.

 

비로소 나는 엽초과 함께 힘없는 현대의 지식을 눈더미 속에 파묻으며

강물처럼 그에게 말하였다.

나도 이제는 고구려의 사내로 말(馬) 달리며

범가죽 같은 나의 나를 남기기 위해

넓은 들을,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 투신하겠다고.

이윽고 고구려의 사내는 야생의 백마를 타고 웃으면서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가고,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를 힘차게 달리면서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설매화처럼 싱싱하게

나고 있었다.

 

 

- 이진영 -

'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1958년 전남 영광 출생,

시집으로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수렵도[狩獵圖](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무용총 수렵도 해설 동영상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변소간의 비밀(박규리)  (0) 2011.04.03
한계령  (0) 2011.04.02
수선화에게  (0) 2011.03.17
[스크랩] 바람꽃의 기다림  (0) 2011.03.07
[스크랩] 오카리나 -ocarina-  (0) 2011.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