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
대지진, 고릴라, 천안함
대학 교정에서 최루탄 냄새가 사라지기 전인 1980년대 말 어느 아침, 도서관 로비의 신문 열람대에서 한 신문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타계한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그 칼럼은 1976년 중국 탕산(唐山) 대지진과 그해 미국 뉴욕의 정전 사고를 대비시키고 있었다.
“탕산에서 인민들은 비극 속에서도 이타주의적 정신을 발휘하며 구호에 나섰다. 반면 뉴욕에서 사람들은 약탈에 나서는 등 ‘연옥(煉獄)’이라고 표현할 모습을 보였다…”며 칼럼은 이상적인 사회주의적 인간상과 탐욕에 물든 자본주의적 인간상을 대비시키고 있었다. 오래 잊고 있었던 칼럼을 떠올리도록 한 계기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사흘 뒤 칼럼에서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일본 국민의 질서와 시민의식을 격찬했다.
리 교수가 그 글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학생 시절 그의 칼럼을 보면서 떠올랐던 의문이 그제야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말대로 탕산 시민이 이기심을 자제하고 이타적 행동에 헌신했다면 그 이유를 ‘사회주의’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적 개인주의 대(對) 동양적 집단주의 전통 등 수많은 요소가 거기 개입됐을 것이다. 그가 전한 탕산의 진실마저 분명한 것만은 아니다. 당시 중국은 외부의 구호를 거부했고 현장 보도는 당국의 엄격한 검열 아래 행해졌다.
이달 국내 출간된 신간 ‘보이지 않는 고릴라’(김영사)는 인간 의식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안겨준다. 1999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진행된 실험. 6명이 공놀이를 하도록 해서 동영상을 찍고 실험 참가자들이 이를 보며 패스 횟수를 세도록 한다. 동영상에는 고릴라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이 공놀이를 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퇴장한다. “고릴라 보셨어요?” 실험 참가자 절반은 고릴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실험에서 보듯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관심 있는 것만 받아들인다. ‘사실’에서 그럴진대 주관이 들어가는 해석의 문제에서는 어떨 것인가.
어떤 정보를 입력해도 이미 구축한 의미망에서 유효한 것만 받아들이는 인간 정신의 취약함은 천안함 폭침사건을 보는 시선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팩트를 들이밀어도 ‘북한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을 부인하는 쪽은 이를 뒷받침할 최소한의 방증까지 샅샅이 끌어모은다.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상대방이 반대 증거를 내놓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내놓아도 논의는 원점에서 돌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서 정부는 ‘광우병에 이어 천안함의 진실에 대해서도 국민의 눈을 가리고 기만하는’ 권력으로 그려진다. 숫자에 의하면, 국민의 20%는 그 같은 주장에 경도되어 있다.
동일본 대지진이 보여주듯 위기 속에서 질서를 유지한 이타주의는 인간 정신의 진화를 증명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 정신이 발전하고 있다며 찬양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한번 결론 내린 바를 바꾸지 못하는 그 경직성과 퇴행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성숙한 사회와 도그마에 빠진 사회를 가르는 것은 외부 현실과 정황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립한 사고 체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회의주의 정신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인간 정신이 계속해서 ‘진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다.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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