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평인]
역사 뒤집기
세계적 명성을 가진 극좌파 지식인들이 2009년 5월 영국 런던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주제로 회의를 열었다. 알랭 바디우, 슬로보예 지젝, 테리 이글턴, 토니 네그리, 장뤽 낭시, 자크 랑시에르, 왕후이(汪暉) 등 우리나라 잡지 ‘창작과 비평’에 자주 언급되는 철학자와 문학평론가가 모였다.
회의에서 발표된 글은 주제와 같은 제목으로 지난해 프랑스에서 출간됐다. 미국 월가발(發) 금융위기로 세계 자본주의가 타격을 받자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 보였던 공산주의를 들고 나왔다. 당시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선언하고 케인즈주의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들은 신자유주의건 케인즈주의건 ‘자본-의회주의(자본주의와 의회주의의 합성어)’일 뿐이고 거기서 벗어나려면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디우와 지젝은 회의를 이끈 두 주인공인데 바디우의 ‘세계사 뒤집기’가 인상 깊었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이 후퇴하기 시작한 것은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부터라고 썼다. 상식적으로는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공산주의 일탈이고, 후루시초프가 그걸 수정하려 한 것으로 보는데 바디우는 오히려 후루시초프를 일탈로 봤다. 그에게는 후루시초프적 일탈의 끝이 고르바초프였고 소련과 동구 현실 공산주의의 붕괴였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역사 뒤집기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고 한국의 이른바 진보를 표방하는 ‘소심한’ 역사가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바디우는 푸코·데리다·알뛰세르 세대와 끈이 닿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마지막 철학자다. 그는 혁명정치학에서 고유명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혁명은 익명의 대중이 일으키는 것이지만 그 이름없는 대중은 스스로 동일시하는 하나의 이름을 갖는다. 그 고유명사가 스파르타쿠스요 로베스피에르요 레닌이요 마오쩌둥(毛澤東)인 것이다. 후루시초프는 스탈린이라는 고유명사의 중요성을 깎아내려 공산 진영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게 바디우의 비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의회주의의 대안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제시했다. 애초에는 의미가 다소 애매모호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인민민주주의라는 허울 속의 수령(首領)독재라는 것이 스탈린에 이르러 명확해졌다. 바디우의 고유명사는 다른 말로 하면 ‘수령’이다. 수령은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특수성은 단지 그 수령이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령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세습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종북(從北)주의를 취하는 한국의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지 않는 배경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민노당은 최소한 논리적이긴 하다. 북한에 내재적으로 접근하면 결국 수령론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당과 대학과 언론과 전교조 안에 있는 비논리적이거나 솔직하지 못한 좌파들이다.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려고 할 때 한 가지 선택해야 할 전제가 있다. 수령론을 받아들이고 그 수령이 저지른 잘못까지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북한을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은 소련과 동구의 공산정권처럼 역사에서 사라질, 애초부터 등장하지 말았어야 할 정권으로 볼 것인가. 후자라면 남한에서나마 ‘자본-의회주의’를 세우려 했던 노력, 북한의 침략을 가까스로 막아낸 한미동맹, 이런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 수령론과 같은 궤변을 전제로 깔아야만 가능한 역사 뒤집기는 세계사에서도 한국사에서도 인정할 수 없다.
송평인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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