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의회

(27) 13 제1차 리옹 공의회(13)

namsarang 2011. 9. 15. 23:06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7) 13 제1차 리옹 공의회(13)

   교황, 정치 권력의 황제를 누르다

▨배경

 독일(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20~1250)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의 보호 속에 성장한 인물입니다. 아버지 하인리히 6세(재위 1190~1197)가 사망했을 때 프리드리히 2세는 3살이었습니다. 어머니 콘스탄차 왕후 요청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어린 프리드리히 2세의 보호자가 됩니다. 하인리히 6세 후임으로 독일 황제가 된 오토 4세(재위 1198~1218)가 교황령을 빼앗는 등 교회와 한 약속을 위반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를 파문하고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해 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도록 합니다.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도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 황제로 인정합니다(1128호, 8월 7일자 참조).


 프리드리히 2세는 1220년 11월 22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인노첸시오 3세 후임 교황 호노리오 3세(재위 1216~1227) 주례로 대관식을 갖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합니다. 이때 호노리오 3세가 내세운 조건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손을 떼는 것과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에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서약했습니다만 대관식 후에 마음이 바뀝니다. 시칠리아를 내놓지 않았을 뿐더러 십자군 원정도 미적거렸습니다. 교황과 황제 사이가 나빠진 것은 당연했습니다.


 1227년 호노리오 3세 교황이 선종하자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는 마침내 십자군 원정에 나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합니다. 그런 가운데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이집트의 이슬람 왕 술탄과 10년 동안 평화협약을 맺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황은 군대를 소집해 프리드리히 2세가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를 공격하게 하지요. 결국 협상을 통해 교황은 황제의 파문을 철회하는 대신 황제는 시칠리아에 대한 교회 권리를 인정합니다. 1230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교황과 황제 사이는 계속 악화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려 했고 교황은 이를 교권에 대한 침해로 여겼던 것입니다. 관계가 악화되면서 그레고리오 9세는 1239년 시칠리아에서 교회 권리를 침해하고 성지 회복을 방해했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프리드리히 2세를 다시 파문합니다.


 교황은 더 나아가 프리드리히 2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공의회를 1241년 부활절에 소집키로 합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고위성직자 100여 명을 태운 배를 붙잡아 억류합니다. 공의회는 무산됐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그해 여름에 선종합니다. 후임 첼레스티노 4세(재위 1241~1241)는 처음으로 '콘클라베'를 통해 교황에 선출됐지만 고령인 데다 허약해 불과 17일 만에 선종합니다.


 이후 교황좌는 거의 18개월이나 공석이 되고 1243년 6월에야 새 교황이 선출되는데 그가 인노첸시오 4세(재위 1243~1254) 교황입니다. 인노첸시오 4세는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황제와 한편으로는 평화협상을 시도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교권을 계속 침해하는 황제와 투쟁할 결심을 굳힙니다. 그러나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이탈리아 중부까지도 장악하고 있는 황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된 지 약 1년 후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 측 감시망을 피해 이탈리아 북부 제노바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의회를 소집해 황제와 맞서 싸우기로 작정합니다. 공의회 소집 장소로는 황제의 영향권 밖에 있는 도시 리옹을 선택했습니다.


 1244년 12월 초 리옹으로 건너간 인노첸시오 4세는 그해 12월 27일 이듬해 6월 24일 리옹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합니다. 이듬해 초 소집장이 주교와 대수도원장, 주교좌성당 참사회 대표, 제후들에게 발송됐습니다.
 
▨공의회 과정과 결과  

 1245년 6월 26일 리옹 주교좌성당에서 공의회가 개막됩니다. 훗날 13번째로 기록되는 세계 공의회였습니다. 참석자는 총대주교 3명에 주교 150명이었고, 기타 성직자와 세속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에서 온 주교들이었고, 이탈리아 주교가 일부 있었습니다. 헝가리 등 동부 지역에서는 타타르(몽골)족 침입으로, 팔레스티나 성지에서는 사라센 때문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위협으로 많은 주교들, 특히 독일와 시칠리아의 주교들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황제 자신은 수에사의 타데우스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이 밖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 황제가 참석했습니다.


 공의회는 모두 3차에 걸쳐 회의를 열었습니다.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첫 회기 개회 연설에서 교회가 안고 있는 다섯 가지 고통을 말합니다. △성직자의 악표양 △사라센의 침입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잃어버린 것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라틴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위협 △타타르족의 동유럽 침입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교회 박해였습니다.


 7월 5일 둘째 회기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 사절단장 타데우스가 황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합니다. 당사자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소명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황제는 끝내 공의회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7월 17일 마지막 제3차 회기에서 황제를 파문하면서 동시에 폐위를 선언합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제에게는 서약 위반, 평화 파괴, 고위성직자 감금, 이단 등 4가지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공의회는 이날 또 22개 조항의 법령을 선포하고 폐회합니다. 법령에는 타타르족의 침입에 대한 지원책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설립된 라틴 제국에 대한 지원책, 그리고 십자군 원정에 대한 호소와 지원책들을 담고 있습니다. 십자군 지원을 위해 모든 성직자들에게 3년 동안 수입의 5%를, 교황과 로마 교회 추기경들은 수입의 10%를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고리대금의 폐해와 함께 남발되고 있는 파문 문제도 지적합니다. 법령의 상당수 조항은 재판 절차와 소송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의미 

 제1차 리옹 공의회는 교회 개혁이나 신자 생활 쇄신에 관한 사목적 공의회가 아니었습니다. 교황권과 황제권의 싸움에 관한 정치적 공의회였습니다. 권투로 치자면 교황권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황제권에 KO승을 거둔 라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이 정치 권력 위에 선 것입니다. 교황권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반대로 프리드리히 1세(재위 1152~1190)에게서 시작된 황제 가문은 결정적 몰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 제1차 리옹 공의회 결의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