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의회

(28) 제2차 리옹 공의회(14차, 상)

namsarang 2011. 9. 16. 23:36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8) 제2차 리옹 공의회(14차, 상)(1274)

▲ 제2차 리옹 공의회가열린 리옹 요한 대성당.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1268년 11월 29일 교황 클레멘스 4세(재위 1265~1268)가 로마 북서쪽 비테르보에서 선종했습니다. 후임 교황을 뽑기 위해 15명으로 이뤄진 추기경단이 비테르보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쉽사리 선출되지 않았습니다. 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 위원회가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프랑스 추기경들로 양분돼 있어 3분의 2 이상 지지를 받는 후보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3년이 흐르면서 비테르보 시민들은 지쳐버렸습니다. 주민들은 화가 나서 추기경들을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 궁전에 가뒀습니다. 그리고는 지붕을 뜯어내고 빵과 물만 내려보내며 새 교황 선출을 강요했습니다. 그래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추기경들은 6인 위원회를 구성해 교황 선출을 위임했고, 6인 위원회는 1271년 9월 1일 마침내 교황을 뽑았습니다. 거의 3년 만이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은 테오발도 비스콘티라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피아첸자 출신이었습니다. 나이는 60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습니다. 주교도, 사제도 아니었습니다. 벨기에 리에주교구 수석부제(Archdeacon)였습니다. 더구나 교황으로 뽑혔을 때는 영국 왕자와 함께 십자군 원정 중이었습니다.
 자신이 교황에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은 테오발도 수석부제는 이탈리아 비테르보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 선출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그레고리오 10세로 짓습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와서 사제품을 받고 1272년 3월 27일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로 축성되고 교황좌에 오릅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눈앞에 펼쳐진 무대가 심상찮고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만만찮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군 원정 길에 동참했던 그로서는 십자군 원정이 성공해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려면 동방 교회와의 일치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졌던 라틴 제국이 몰락하고 다시 비잔틴 제국 황제 미카엘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시칠리아 왕 샤를이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왕 생 루이 9세(재위 1226~1270)의 동생인 그는 이탈리아를 넘어 비잔틴 제국까지 넘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 독일 지역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재위 1220~1250) 이후 황제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고 제후들간 왕권 다툼이 일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까지 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교황좌가 공백으로 있었다는 것도 그냥 둘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황 선거와 관련한 새로운 조치가 요구됐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목자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생활이 본래 정신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교회 생활, 특히 성직자 직무와 규율의 쇄신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1273년 4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리옹에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소집령을 발표합니다. 공의회 장소를 리옹으로 택한 것은 샤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개최와 주요 결정 내용 

 공의회는 1274년 5월 7일 리옹의 요한 대성당에서 개막합니다. 14번째 세계공의회로 기록되는 제2차 리옹 공의회입니다. 대주교와 주교 300여 명, 대수도원장 60여 명, 기사 수도회 대표, 주교좌성당 참사 대표와 신학자들, 프랑스ㆍ독일ㆍ영국ㆍ시칠리아ㆍ아라곤 왕들이 보낸 사절들도 참석했습니다.
 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공의회에 참석하러 오는 도중 로마 근교에서 선종했습니다. 당시 동유럽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타타르(몽골)족도 사절단을 보내왔고, 동방 교회 쪽인 그리스 사절들은 배가 난파돼 6월 24일에야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 개회 연설에서 예루살렘 십자군 원정, 동방 교회와 일치, 교회 개혁을 주요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5월 18일 2차 회기에서는 십자군 자금 마련 방법이 결정됩니다. 직위의 높낮이에 관계 없이 모든 성직자들이 6년 동안 수입의 10분의 1일을 내도록 했습니다. 또 십자군 원정을 위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6년 동안 평화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7월 6일 제4차 회기에서는 동방 교회와 일치와 관련되는 내용이 논의됩니다. 그리스 사절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연옥 교리, 일곱 성사를 받아들이고 '필리오케'(성령이 성부에게서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발한다는 뜻)를 삽입한 신경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황제를 대신해 로마 교회와 일치를 서약합니다.
 7월 16일 제5차 회기에서는 교황 선거법(Ubi periculum, '위험이 있는 곳')이 마련됩니다. 이에 따르면 교황 서거 10일 후에 추기경들은 콘클라베(외부와 차단된 공간)에 들어가 교황 선출 투표를 합니다. 콘클라베에 들어간 후 3일이 지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5일 동안 추기경들에게는 매일 한 끼분 식사만 제공됩니다. 이렇게 해서 5일이 지나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매일 빵과 물과 포도주만 제공됩니다.
 이미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1179년)는 3분의 2 이상 득표한 후보자가 교황으로 선출된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만, 3년이라는 긴 기간 교황좌가 공석이 되는 불상사가 발생했기에, 추기경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육지책으로 이런 보완 규정을 마련한 것입니다.
 공의회는 7월 17일까지 6차 회기를 통해 모두 31개 법령을 인준하고 폐회합니다. 교황선거법, 동방 교회와 재일치에 관한 법령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개혁에 관한 법령들인데 주교선출, 성직자 자격 요건, 교구와 수도회 관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고, 고리대금업 등에 관한 법도 있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수도원들이 주교들에게 예속됨을 분명히 하고 수도회 회원들에게는 여러 제약을 가하면서도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는 이 규정에 저촉받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두 수도회가 보편 교회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산 것입니다.
 그레고리오 10세는 공의회 기간 중에 몇 가지 정치적 결정을 내립니다. 독일 왕권을 둘러싼 다툼과 관련해서는 합스부르크 왕가 루돌프 왕의 손을 들어줍니다. 또 아라곤 왕국(스페인 중북부 지방) 야고보 1세는 교황의 충성 맹세와 봉토세 요구에 화가 나서 돌아가 버리지요.
 한편 공의회에 참석한 타타르족 사절들은 사라센에 맞서 그리스도교 세계와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만 사절 가운데 한 명이 공의회 기간 중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