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백경학]
다른 사람 위해 밥 한 끼 굶은 적 있는가
기사입력 2011-12-10 03:00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머니, 무슨 바구니예요?” 여든을 훌쩍 넘겼을 할머니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아직 고운 얼굴이었다. “기부하려고 가져온 것이라우!”
헌금 차례가 되자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독일 신부님이 성호를 그어 발이 꽁꽁 언 신자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으로 미사가 끝났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성당문을 나서고 계셨다.
1년간 한끼 금식한 돈 모아 기부
나는 부리나케 할머니를 쫓아갔다. “할머니! 바쁜 일 있으세요?” “왜 그러우?” 할머니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눈이 그친 것 같아요. 할머니하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요.” “나하고 말이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미사 중에 왜 바구니를 소중하게 안고 계셨는지 물었다.
“벌써 50년도 더 된 이야기라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우리 가족은 정말 비참하게 살았어요. 전쟁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네 살 아들, 두 살 딸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짐했다오.” 할머니의 눈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우리 가족은 며칠째 굶주리고 있었다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처럼 주먹만 한 감자 세 개가 현관 앞에 놓여있는 거야. 모두 가난해서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때였다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날마다 놓여있었다오. 새벽녘 창문 틈으로 내다보니까 이웃집 할아버지가 다가와 감자 세 개를 현관에 놓고 사라지는 거야. 옆집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 둘을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오.”
그때 할머니는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한다. 두 달 동안 옆집 할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친척의 소개로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생명의 은인인 노부부와 헤어졌다. 전쟁 통이지만 다행히 조그만 가게에 취직해 그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며 두 아이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 아들은 베를린에서 은행지점장으로 있고 딸은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 그 바구니가 뭐예요?”
“아 참!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한 20년 됐나 보오. 아마 이맘때일 거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방송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어린이들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오. 그때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전쟁 통 기억이 떠오른 거야. ‘그래!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거야’ 하고 말이지.”
할머니는 전쟁 시절 노부부로부터 매일 감자를 얻어먹으면서 그 혹독했던 시절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매일 아침 식사를 대신해 기도한 뒤 식사비를 저금했다. “보통 독일 사람들은 아침에 빵과 우유, 치즈를 먹으니 환산하면 3마르크(약 1800원), 그만큼씩 매일 저금하는 거지요.”
할머니는 그날부터 1년 동안 금식하며 모은 1000마르크(약 60만 원)를 연말이 되면 낡은 바구니에 넣어 성당에서 주관하는 제3세계 어린이구호기금에 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께 언제까지 금식을 계속하실 것인지 물었다.
獨연수시절 만난 할머니 못잊어
“그때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시 할아버지와 헤어지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지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할 거예요.”
말씀을 마친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구텐 바이나크텐(성탄을 축하해요)”이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을 맞으며 성당 앞에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10개월 더 그 마을에 살았지만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겨울이 깊어가면 그리움도 깊어가는 것일까.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한다. 나는 올 한 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밥 한 끼 굶은 적이 있는지 반성해 본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우리 가족은 며칠째 굶주리고 있었다오. 그런데 어느 날 기적처럼 주먹만 한 감자 세 개가 현관 앞에 놓여있는 거야. 모두 가난해서 누구를 도와준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때였다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날마다 놓여있었다오. 새벽녘 창문 틈으로 내다보니까 이웃집 할아버지가 다가와 감자 세 개를 현관에 놓고 사라지는 거야. 옆집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 둘을 잃고 할머니와 단둘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오.”
그때 할머니는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고 한다. 두 달 동안 옆집 할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다가 친척의 소개로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서 생명의 은인인 노부부와 헤어졌다. 전쟁 통이지만 다행히 조그만 가게에 취직해 그 어려웠던 시절을 견디며 두 아이를 공부시킬 수 있었다. 아들은 베를린에서 은행지점장으로 있고 딸은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 그 바구니가 뭐예요?”
“아 참!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한 20년 됐나 보오. 아마 이맘때일 거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방송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어린이들이 전쟁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오. 그때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전쟁 통 기억이 떠오른 거야. ‘그래!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거야’ 하고 말이지.”
할머니는 전쟁 시절 노부부로부터 매일 감자를 얻어먹으면서 그 혹독했던 시절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니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매일 아침 식사를 대신해 기도한 뒤 식사비를 저금했다. “보통 독일 사람들은 아침에 빵과 우유, 치즈를 먹으니 환산하면 3마르크(약 1800원), 그만큼씩 매일 저금하는 거지요.”
할머니는 그날부터 1년 동안 금식하며 모은 1000마르크(약 60만 원)를 연말이 되면 낡은 바구니에 넣어 성당에서 주관하는 제3세계 어린이구호기금에 내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께 언제까지 금식을 계속하실 것인지 물었다.
獨연수시절 만난 할머니 못잊어
“그때 굶어 죽을 수도 있었던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시 할아버지와 헤어지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이제 그 은혜를 갚아야지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할 거예요.”
말씀을 마친 할머니는 몸을 일으켜 “구텐 바이나크텐(성탄을 축하해요)”이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다시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을 맞으며 성당 앞에 서 있었다.
우리 가족은 10개월 더 그 마을에 살았지만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겨울이 깊어가면 그리움도 깊어가는 것일까. 오늘도 두 손을 모으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한다. 나는 올 한 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밥 한 끼 굶은 적이 있는지 반성해 본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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