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오늘 복음에서,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 빛이신 주님을 맞이하라고 하는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그리고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그 예언자도 아니며,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임을 증언한다. 대림 제3주 복음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요한 세례자의 겸손에 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너 자신을 알라' 등 속담들과 격언들에서 우리는 이미 겸손에 관해 너무 많이 듣고 배워왔다. 좁게는 가족과, 더 나아가 타인과의 공동체 생활에서 남을 존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 미덕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겸손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말은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어떤 학문을 연구하든, 또는 신앙을 탐구할 때에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에서 온유함과 관대함과 이타심이 겸손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곧 사랑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결핍은 무지나 아집, 더 심할 경우 겸손을 가장한 교만으로 드러난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 2, 6-7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라고 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다.' 이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출이며 사랑 즉 하느님 정체성을 정확하게 밝힌 것이다. 사랑이 개념적으로는 영구불변하며 절대적 보편 가치일지 모르나 사랑의 현실적 구현은 상황에 따라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즉 하느님의 더 크신 사랑이 미소한 인간에게로 내려오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겸손이다. 요한 세례자는 그리스도, 엘리야 그리고 그 예언자도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자신의 정체임을 밝힌다. 유다인들이 '소리'를 '빛이신 주님'으로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요한의 정직함은 겸손과 연결되며 또한 진실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어떠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우리는 자신이 피조물이며 불완전한 존재임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신앙인이다.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이 타인을 잘 아는 것이 된다. 어느 이유에서든 나의 이성, 신앙의 잣대로 이웃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은 어떠한 벼랑 끝에 서 있어도 결코 양보할 수없는 가치를 가지며, 그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 즉 인격이다. 인간 행위의 성스러움과 위선은 정비례할 수 있고, 교만과 열등의식은 동전의 양면일 뿐 결국은 같은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가 깊어지고, 골짜기가 깊어지면 산이 높아진다. 우리는 교만이 숨겨져 있는 겸손에 반감을 갖는다. 반감은 단순히 지각없는 성냄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가 어떤 것을 취할 때 갖는 부당함에 대한 도덕적 표현의 주장이며, 이 부당함은 한 개인의 악덕에 끝나지 않고 미덕과 충돌할 위험이 있다.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적 언어다. 그리고 이 신앙적 언어는 하느님 사랑에 근원을 둔다. '인생은 겸손을 수련하는 수련장'이라하듯 누구나 살면서 세월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겸손해지면서 하느님 사랑을 그리워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성급하지 않는 기다림이다. 사람이 되시어 인간에게 오시는 하느님께서도 구약의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다.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그 분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리워 할 때까지…. 우리는 이웃을 우리 마음에 맞게 변화 시킬 수 없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느님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은 또 다른 나의 모습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그 타인과의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는 것뿐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겸손은 사랑이요, 사랑은 기다림이다. 또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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