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 ▲ 조재형 신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캐나다에 살 때의 일입니다. 커피를 마시면 컵의 말려진 부분에 경품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는 교우 분과 마셨는데 그날도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열어보면서 말을 하는 겁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더군요. 커피 경품은 내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예수님 부활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주님 부활'은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꼭 해야 할 어떤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성삼일을 지내면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하고 그 의미를 내 삶에 받아들이기보다는 '아! 올해도 주님의 부활이 지나갔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물론 교구에 와서는 제가 직접 모든 전례를 하는 것이 아니어서 좀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주님 부활이 그렇게 나에게 의미 있고, 그렇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성 금요일에 양로원에서 수난 예절을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주님 수난 전례에 참여하였습니다. 제가 십자가를 모시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가서 십자가 경배를 받았는데 그 중 한 할머니가 예수님 발에 입술을 대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랜 삶을 살았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실 그 할머니에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렇게 뜨거운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를 닮은 배우 더스틴 호프만도 나오고 스티브 멕킨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은 절벽에서 바다로 몸을 던집니다. 심한 파도에 바위에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그 절벽 위에서 몸을 던지는 주인공은 결국 자유를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수도 없이 탈출을 시도했고 번번이 실패했던 주인공은 결국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던지는 죽음 없이는 부활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복음을 선포하고, 어떤 고통과 두려움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욕심도 다 버렸을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몸속에 있는 아이에게 탄생은 어쩌면 죽음과 같은 두려움과 고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탯줄에 연결되어 매일 아무 수고 없이 양식을 받아먹고, 엄마의 몸 안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내는 아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자유롭게 편안한 곳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 하고, 나오지 못하면 결국 아이도 엄마도 위험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던 탯줄을 끊어야만, 엄마의 몸에서 나와야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체험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을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끊어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보다 진실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