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 향락의 도시에 복음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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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 하면 무엇보다 사도 바오로의 활동 무대로 유명하다. 그리스 코린토는 기원전 500년쯤엔 무역과 상업이 번창한 인구 30만의 대도시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됐다가 기원전 44년에 재건됐으나 그 후 수차례 지진으로 폐허가 됐다. 당시 코린토는 상업과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고 일찍부터 도자기 생산에도 유명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많은 유적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반유다주의 정책(45년)에 따라 코린토로 이주한 2만 5000명의 유다인에게 전교했다. 전교 기간 동안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작성했다. 사도 바오로는 2년간의 연금 생활을 마치고 로마, 코린토, 테살로니카 등지에 세운 그의 교회들을 돌아본 것으로 추정된다.
코린토는 자체 항구도시는 아니지만 북쪽과 동쪽에 항구를 끼고 있어서 상업이 번창하였다. 북쪽에 있는 코린토만에는 레카이온 항구가 있어 아드리아 해로 통했고 동쪽 샤론 만에는 캥크레애 항구가 있어 에게 해로 통했다. 유럽과 동방의 문물이 교역되던 곳이었다. 기원전 146년에 로마군은 코린토를 점령해 초토화하고 44년에 율리우스 체사르는 코린토를 로마인이 사는 식민 읍으로 재건하였다.
코린토는 전형적인 그리스 문화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코린토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신전 중에서 가장 지독한 것 중 하나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모신 신전이었다. 이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 매음행위를 자행하곤 했다. 그래서 당시 코린토는 퇴폐의 상징이 됐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코린토 교회는 많은 성적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다. 향락도시로도 유명했고 우상숭배도 극도에 달한 이곳 코린토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 (1코린 13)를 집필했다.
바오로 사도는 2차 선교여행(50~52년쯤) 중에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1년 반 동안 머물렀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사도 18,11) 신자들 가운데 상류계층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6-27)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를 세우고 떠난 다음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 아폴로가 코린토 교회에 와서 활약했다. 그는 당대 교회에서 설교 잘하기로 소문났던 인물이다.(사도 18,24-19) 사도 바오로는 3차 전교여행(53~58년쯤) 중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 에페소에 27개월 가까이 머무르면서(사도 19,8-10 참조) 코린토 교회로 세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분실되고 오직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만 전해온다. 그리고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집필했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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