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두 눈으로 세상보기

namsarang 2015. 1. 18. 13:51

[생활 속의 복음] 두 눈으로 세상보기
연중 제2주일·일치 주간 (요한 1,35-42)
2015. 01. 18발행 [1298호]
 

▲ 박재식 신부(안동교구 사벌퇴강본당 주임)



17년 전 읍 소재지에 있는 본당에서 사목할 때 이런저런 모임이 많았습니다. 밤마다 여러 모임  함께하다 보니 밤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나무에 집중하느라고 숲을 바라보지 못한 듯합니다.

지금의 산골 본당 생활은 나무를 보면서도 숲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삶에서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자주 잠기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즘 저녁 미사를 마치고 컴컴한 사제관에 들어와 불을 켜면 나타나는 사물들의 색상입니다. 아무런 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어둠 속 공간에 전등의 빛이 발사되면서 드러나는 색상의 잔치는 정말 놀랍습니다. 저 사물들은 본래 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빛에 의해 잠시 반사되는 일시적인 착각일까? 고민을 해봤습니다. 책을 통해 이런 의문들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벌어지는 논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자론자들(데모크리토스, 기원전 460~ 370?)은 “색이란 빛을 이루는 원자와 우리 감각 기관의 상호작용 결과이기 때문에 빛이 없어지면 색도 없어진다”고 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사물의 색은 고유한 성질이므로 빛이 없으면 색이 보이지 않더라도 색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지개처럼 사라지는 거짓색과 사라지지 않는 물체 본성인 참된 색으로 색을 분류했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데카르트와 뉴턴에 이르러 입자설로 정리됩니다. 지금은 빛의 입자설과 파동설이 인정되고 있지만 아직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 드러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어찌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나 종교 사이의 갈등과 반목도 서로에 대한 이해, ‘제대로 바라보기’가 부족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치 주간을 맞이한 우리는 수많은 그리스도 교회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요? 우리가 장자(長子) 또는 적자(嫡子)라는 생각으로 타 종교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지요? 한 가지 생각으로 주변을 판단하지는 않는지요?

종교 재판에서 이단자로 죽임을 당한 이탈리아 종교개혁자 사보나롤라(1452~1498)의 삶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사보나롤라가 살던 시대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로마 국가의 왕으로 주변 국가들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일삼았습니다. 어찌 보면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켰고, 각종 전염병과 식량 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으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유럽의 유력 가문과의 혼인, 성직매매 등을 하며 세상의 권력과 부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등장한 이가 사보나롤라입니다. 도미니코회 수사였던 그는 절대 왕권을 가진 교황과 메디치 가문(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 등 3명의 교황을 낸 이탈리아의 유명한 가문)에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인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검소하고 윤리적인 생활을 강조했습니다. 또 공화정 시대를 열어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부르짖었습니다. 후에 사보나롤라의 영향을 받은 이가 종교 분열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1483~1546)입니다.

종교 분열로 인해 유럽 사회는 전쟁에 휩싸였고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서로 경쟁자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집중하며 형제적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습니다.

오늘 1ㆍ2독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좋은 예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대제사장인 엘리의 레위 가문이 아니라 에프라임 가문의 어린이를 당신의 참된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문이나 종파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저희를 초대하십니다.

여러 주파수와 파동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하고 여러 색채의 염료가 빛과 만나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바라고,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격려와 위로의 형제적 사랑으로 멋진 세상을 만들어갑시다.

“획일성은 모두에게 고통을, 다양성은 모두에게 기쁨을!”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