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

맥아더 "캘리포니아 지키듯 한국 지킬 것"… 탱크 호위 속 祝賀식장에

namsarang 2015. 3. 7. 22:08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맥아더 "캘리포니아 지키듯 한국 지킬 것"… 탱크 호위 속 祝賀식장에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 입력 : 2015.03.07 03:00

    [9] 1948년 정부 수립된 날

    李대통령, 행사 직전 초청장… 김포공항까지 나가 영접
    맥아더 부친이 고종에 받은 향로 家寶 잃어버린 것 알고 똑같은 향로 찾아 선물
    맥아더, 4시간만에 日 귀환

    광복 3주년인 1948년 8월 15일 오전 11시 20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이 거행됐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찾아온 그해 여름이었지만, 그날만큼은 하늘도 화창하게 맑았고 무더위도 한풀 누그러졌다.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충청·전라·경상 지방에 폭우가 쏟아졌다. 8월 9일까지 확인된 수해 피해만도 사망자 316명, 중상자 992명, 실종자 345명, 가옥 유실 3232호, 침수 5만7544호 등에 이르렀다. 30년간 최악의 기상 재난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축하식이 거행되는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로 광복 후 정부 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쓰이다 1995년 철거됐다) 앞부터 세종로·시청·남대문 앞까지 새벽부터 인파가 몰려들었다.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손에 들고 행진하는 학생들의 행렬이 거리마다 이어졌다.

    
	이승만(가운데)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서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民國)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축하하는 것”이라며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이승만(가운데)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서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民國)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축하하는 것”이라며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15일 오전 이화장을 출발한 이승만 대통령의 관용차는 행사장인 중앙청이 아니라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군용기 편으로 내한하는 일본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축하식을 나흘 앞둔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청장을 보내고, 맥아더가 이를 흔쾌히 수용하면서 맥아더의 방한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맥아더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관할하는 미국 극동사령부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그가 참석한다는 것만으로도 축하식의 격은 높아질 수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범석 국무총리 부처가 공항 영접을 맡을 계획이었지만, 행사를 1시간 남짓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 부처가 직접 공항까지 찾아갔다.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인도를 받으며 한국 땅에 첫발을 내디딘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공항에서 맥아더는 "나는 캘리포니아와 내 조국을 지키듯 한국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5분 남대문 쪽에서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고, 미군 군용차 수십 대가 중앙청 앞 식장으로 다가왔다. 맥아더 장군을 태운 군용차 앞뒤에서 미군 탱크 두 대가 호위했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존 하지(왼쪽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과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 점령군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존 하지(왼쪽부터)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과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 점령군 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11시 20분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를 안내해 특설단(特設壇)에 올랐다. 11시 22분 흰 두루마기를 입은 축하식 준비위원회 회장 오세창이 "이제부터 개회합니다" 하며 개막을 선언했다.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으로 당시 85세 고령이었던 오세창을 대신해 심계원장(審計院長) 명제세가 개회사를 대독했다.

    애국가를 제창하는 동안 중앙청의 국기 게양대에는 군정 3년 동안 게양되었던 성조기 대신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며 올라갔다. 기념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유장한 목소리로 민주주의, 자유와 책임, 통상과 공업 진흥, 근로자와 기업의 공존, 통일 방략(方略) 등 신생 대한민국의 포부를 밝혔다. 기념사가 이어진 30분 내내 하늘빛 모시 두루마기 차림의 이승만은 74세라는 고령이 무색하게 한여름 햇살과 연이은 플래시 세례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기념사의 마무리를 통해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출범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30년 전에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서정주 작사, 이흥렬 작곡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가' 합창이 끝나자, 축사를 위해 맥아더 장군이 마이크 앞에 섰다. 맥아더는 축사에서 "정의의 군대가 용진하는 이 시각에, 그 승리는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 가운데 하나인 인위적 장벽과 분단으로 무색해졌다"면서 "이 장벽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며, 무너질 것이다. 자유 국가의 자유로운 한국인들의 궁극적인 통일을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축사가 끝나자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대통령 부인은 맥아더 장군 부인에게 각각 선물과 꽃다발을 선사했다.

    
	1948년 8월 15일의 발언들 정리 표
    선물은 250년 된 향로였다. 맥아더 원수의 부친 아서 맥아더 장군은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했다가 고종 황제로부터 향로를 하사받은 인연이 있었다. 이 향로를 물려받은 아들 맥아더 원수도 가보로 아끼며 전장에도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때 필리핀 전장에서 급히 퇴거하면서 분실한 뒤 줄곧 애석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똑같은 향로를 찾아 선물한 것이었다. 축하식은 오후 1시 30분 오세창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와 '맥아더 장군 만세'를 각각 삼창(三唱)하는 것으로 끝났다.

    중앙청 앞에서 거행한 축하식이 끝난 후, 맥아더 부부는 곧장 도쿄로 돌아갔다. 4시간 남짓한 짧은 방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시청 앞으로 이동해 군(軍) 통수권자로서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사열하고 분열식을 참관했다. 오후 3시 경무대 대통령 관저에서는 내외빈 600여 명을 초청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다과회'가 열렸다. 경복궁 후원에 있던 경무대는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로 건립됐고, 정부 수립 직전인 8월 12일까지는 군정 사령관의 관사로 사용됐다. 다과회가 끝날 때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를 잘 보존해준 데 대한 사의로 하지 중장에게 그림 한 폭을 선사했다. 사흘 전까지 하지 장군 침실에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그날 자정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미 군정으로부터 주권을 넘겨받았다. 축하식 준비단에서 주관한 표어 공모전에는 4353편이 접수됐다. 1등 없는 2등 당선작은 그날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오늘은 정부 수립, 내일은 남북 통일."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대한민국이란 이름은 舊韓末부터 쓰였다"김성현 기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