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

자기 논 받은 농민들… "6·25때 대한민국 지키는 데 앞장"

namsarang 2015. 3. 21. 22:24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자기 논 받은 농민들… "6·25때 대한민국 지키는 데 앞장"

  •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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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5.03.21 03:16 | 수정 : 2015.03.21 08:47  

    [11] 이승만의 농지개혁

    - 유상 몰수, 유상 분배 원칙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에 발탁, 한민당 반대 무릅쓰고 추진

    - 사유재산권 제도 인정
    北, 폭력적 방식으로 진행… 남한은 지주·농민·정부 등 다수가 共生하는 길 찾아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사진
    주익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1915년 전남 담양 백동리의 최석환은 3688평 논밭을 가진 자작농이었다. 1945년 광복 무렵 그의 가족은 6명에서 15명으로 늘었지만, 그동안 단 한 평의 땅도 늘어나지 않았다. 장남 이외의 다른 두 아들은 오히려 소작농이 됐다. 그들은 35년 뒤인 1950년 4월에 이르러서야 논 1428평을 새로 얻었다. 바로 농지개혁 덕분이었다(양지은, 이화여대 석사 논문 '농지개혁과 한국농촌사회 변동').

    1950년 농지개혁은 이 땅에서 수백년 넘게 지속됐던 지주·소작제를 없애고 농민에게 농지를 돌려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해 4월 농가가 농지 분배 예정 통지서를 받았을 때, 당시 언론은 '전국적인 해방의 날'이라 불렀다. 이전까지는 '지주 세상'이었다. 해방 당시 남한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했으며, 전체 경지 가운데 3분의 2는 소작지였다. 농가 206만호 중 자작농은 14%에 불과했다. 소작농은 수확량의 절반가량을 소작료로 냈다.

    소련군 치하의 북한에서는 1946년 3월 토지개혁이 전격 단행되어 지주제가 철폐됐다. 그해 2월 출범한 사실상의 북한 정권은 지주 소유지를 무상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 분배했다. 지주는 살던 마을에서 쫓겨났다. 북한 정권은 "농민들이 공자, 맹자도 해결 못한 토지 문제를 김일성 장군이 해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남한에서도 농지개혁은 기정사실이 됐다. 우파에게는 공산주의 득세를 막는 반공주의 차원에서, 또 공업입국(工業立國) 차원에서도 농지개혁이 필요했다.

    
	1950년 농지개혁이 실시될 무렵의 농촌 풍경 사진
    1950년 농지개혁이 실시될 무렵의 농촌 풍경. 지주·소작제를 일소하고 농민들이 자작농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6·25전쟁 발발로 농민들의 삶은 다시 피폐해졌다.
    당초 농지개혁을 서두른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1947년 초 옛 일본인 소유 농지를 분배하자는 법안을 냈고, 한 해 뒤에는 5·10 선거를 앞두고 그를 실행에 옮겼다. 농지개혁을 드러내놓고 반대한 정파는 없었다. 어느 정파든 정부 수립 후 최우선 과제로 농지개혁을 꼽았다. 제헌헌법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명시됐다. 다만 각 정파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하고자 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농지개혁이 본격 추진됐다. '유상 몰수, 유상 분배'가 원칙이었다.

    이승만은 정통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무소속 의원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중도파 경제학자인 이순택을 기획처장에 각각 임명했다. 좌익 단체의 토지 문제 연구 총책을 맡았던 농업경제학자 강정택이 농림부 차관에, 중도파 강진국과 윤택중 등이 농지국에 자리 잡았다. 이처럼 이승만은 중도파로 농지개혁 담당 라인을 구축했다. 농지개혁에 적극적인 중도파로 지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한민당을 제압하려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1949년 공포된 농지개혁법 책 사진
    1949년 공포된 농지개혁법.

     

     

     

     

     

     

     

     

     

     

     

     

     

    조봉암의 농림부 팀은 지주가 평균 수확량의 150%를 보상받고 농민이 평균 수확량의 120%를 상환하며 차액 30%는 국고 부담으로 하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 재정 부담을 꺼린 이승만은 지주 보상액과 농민 상환액을 200%로 똑같이 맞춘 기획처 안을 택했다. 그 직전 조봉암은 한민당의 정치 공세 때문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국회에서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과 무소속 소장파는 정부안 대신 수확량의 150% 지주 보상, 125% 농민 상환으로 절충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국회의 재의결로 1949년 6월에 이 법이 공포되었다.

    미국 원조로 재정을 근근이 꾸려가는 처지에 정부가 지주 보상액과 농민 상환액의 차액을 떠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승만은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는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를 거부했다. 정부의 수정 요구에 따라, 결국 지주 보상액과 농민 상환액을 수확량의 150%로 맞춘 개정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어 1950년 3월 공포됐다. 이후 시행령·시행세칙·세부규정이 6월까지 제정 공포됐다.

    곧바로 6·25전쟁이 터졌지만 이미 농지는 분배된 뒤였다. 1949년부터 준비를 해온 정부는 1950년 3월 농가별 분배 농지 일람표를 만들어 공람하게 했다. 4월에는 '장차 자신의 농지가 된다는 전제하에 안심하고 파종(播種)'할 수 있도록 농지 분배 예정 통지서 발급을 마쳤다. 법규가 확정되기도 전에 시행부터 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유시를 내리며 독려한 결과였다.

    1950년 당시 분배된 토지는 귀속 농지 26만8000정보, 농지개혁 31만7000정보였다. 그전에 70만4000정보가 농민에게 방매(放賣)됐다. 농지개혁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를 불철저한 면모로 보았지만, 최근 실증적 연구를 통해 '사전 방매가 농민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는 점이 밝혀졌다.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 체제가 성립하였다. 사실상 소작권과 같은 경작권만 얻은 북한 농민과 달리, 남한 농민은 완전한 소유권을 얻었다.

    
	농지 개혁에 대한 발언들 정리 그래픽

    북한의 토지개혁이 사유재산권 제도를 부정한 반면, 남한의 농지개혁은 이를 인정했다. 이승만은 의도대로 농민을 '장악'했고, 농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농지의 신속한 분배는 곧이어 터진 6·25전쟁에서 대다수 농민이 대한민국에 충성을 바치는 국민으로 남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방어함에 크게 공헌했다"('대한민국 역사')고 평가했다.

    농지개혁 이후 현실은 장밋빛 전망과는 달랐다. 곧이어 일어난 6·25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지주와 농민은 제각기 경제적 곤란에 처했다. 전시(戰時) 인플레이션은 지주 보상금을 쪼그라트렸다. 막대한 군비를 메우기 위해 지세와 호별세 등 각종 세금을 통합해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는 임시 토지 수득세(收得稅)가 부과되면서 농가 경제는 피폐해졌다.

    북한의 토지개혁이 일거에 지주를 절멸시키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반면, 남한의 농지개혁은 오랫동안 시일을 끌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야 완수됐다. 지주와 농민, 정부 등 여러 이해관계자가 이익과 손실을 절충하여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니라 다수가 공생할 길을 찾은 것이었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지주와 농민, 여러 정파 간 절충과 타협이 낳은 빛나는 성과였다.

    "한국, 농지개혁 통해 경제발전 이룩한 예외적 경우에 속해"김성현 기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