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13) 피란민 몰려든 부산 풍경
입력 : 2015.04.02 03:00 | 수정 : 2015.04.02 06:48
- 他地서도 악착같이 살아나가 시장·부두 근처 판잣집 짓고 장사·막노동하며 생계 꾸려 전쟁 후 국제시장 점포, 이북·서울 출신이 70% 차지
- 大學 등 학교도 부산으로…천막 교실에 의자도 없었지만 전쟁 前보다 학생 수 늘어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부산에
부산에 첫 피란민이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28일, 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 후였다. 전방의 군인 가족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피란민 16만여명이 부산으로 내려왔고, 1·4 후퇴 이후 26만여명이 또다시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1949년 47만여명이던 부산 인구는 전쟁 기간 85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인구가 배 가까이 불어나자 부산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은행원 월급이 5만원, 전시 호경기를 맞은 무역회사 직원의 월급도 10만원 남짓이었던 시절 계란 한 알에 380원, 양복 한 벌에 70만~80만원을 호가했다. 물이 부족해 수도는 허구한 날 단수(斷水)였다. 어쩌다 물이 나오면 서로 먼저 받겠다고 악다구니를 쳤다. 전쟁 기간 겨울 날씨마저 유례없이 추웠다. '서울 사람들을 따라 추위도 부산으로 피란 내려왔다'는 말이 유행했다.
부산에 신세 질 만한 지인도 없고, 월세를 감당할 능력도 없는 사람들은 피란민 수용소로 몰려들었다. 개전 직후에는 극장, 공장 등 대규모 건물들을 중심으로 수용소가 설치됐다. 40여개 수용소에 7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됐다. 수용소에는 '사상이 온건한 피란민'만 선별적으로 수용됐고, 구호물자도 제공됐다. 1·4 후퇴 이후 대규모 피란민이 몰려들자 여관·요정·적산가옥 등 행정력이 미치는 공간이면 어디든 피란민 수용소로 지정됐다. 하지만 밀려드는 피란민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산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정부는 피란민의 부산 유입을 억제하고, 거제도를 비롯한 경남 각지와 제주도로 분산을 유도했다. 흥남 부두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한 피란민 1만4000여명이 부산이 아닌 거제도에 수용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집단 피란민'은 어느 정도 통제와 분산이 가능했지만 개별적으로 이주하는 '자유 피란민'의 유입마저 막을 방법은 없었다.
- 1951년 2월 부산으로 피란 온 일가족(사진 위 왼쪽). 소설가 박도씨가 미 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발굴한 사진이다. 1951년 8월 부산에서 열렸던 이화여대 졸업식(사진 아래). 전시에도 춤바람은 일었다. 1952년 부산의 사교춤 모임(사진 위 오른쪽). /눈빛출판사 제공
수용소에 자리를 얻지 못한 피란민들은 국제시장과 부두 등 시내 중심가 근처에 '하꼬방'(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밤에 부산항에 입항한 외국인 선원들은 용두산·복병산 등 고지대에 빼곡히 들어선 하꼬방의 불빛을 보고 부산에 고층 빌딩이 많은 것으로 착각해 놀라기도 했다.
폐목재나 종이박스로 대충 지은 하꼬방들은 화재에 취약했다. 밀집해 지어진 탓에 한번 화재가 나면 이웃 하꼬방으로 옮아붙어 대규모 화재로 번지기 일쑤였다. 연이은 대규모 화재로 '났다 하면 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정부와 부산시는 도시 미관, 위생, 교통난, 화재 위험 등 갖가지 명분을 내걸고 하꼬방을 단속하고 수시로 철거했다. 하지만 철거당하더라도 하루면 다시 지을 수 있어 그다지 실효성은 없었다.
부산 피란민의 절반 이상은 무업자(無業者)였다. 나머지는 국제시장 등에서 장사를 하거나 부두에서 하역 노동자로 일하며 대부분 생계를 유지했다. 국제시장은 해방 직후 한국에서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가재도구나 생활용품을 한꺼번에 내다 팔면서 형성된 '도떼기시장'에서 유래했다. 미 군정기에는 미군 물자나 구호물자를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포장한 채로 거래하는 시장으로 변모했다. 내용물에 따라서 대박이 터질 수도 있지만, 자칫 쪽박을 찰 위험도 도사리고 있는 거래 방식이었다. 당초 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가 주도했던 도떼기시장은 자유시장을 거쳐 1949년 국제시장으로 개편되면서 부산·경남 사람들이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전쟁 이후 국제시장의 주도권은 피란민들에게 다시 넘어갔다. 고정 점포의 50%는 월남(越南) 피란민, 20%는 서울 피란민의 소유였다. 노점상의 90%, 행상의 95%도 피란민들이었다. 국제시장은 전쟁 경기를 타고 급성장했다. 하루에 10억원 이상의 물품이 거래되었고, 출입하는 인원도 10만여명에 달했다. 공중화장실 2곳의 분뇨 처리 비용만 매월 400만원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국제시장에서는 밀수품·미군용품·원조물자 등 부정한 물품의 거래도 많았지만, 피란민들이 생계를 위해 내놓은 금붙이와 의복의 거래도 적지 않았다.
피란민과 함께 학교도 부산으로 피란 내려왔다. 1951년 2월 서울사대 부속중학교가 보수동에서 개교한 것을 필두로 같은 해 10월까지 서울의 중등학교는 거의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개교했다. 1951년 2월에는 문교부의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조치령'을 근거로 설립된 전시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이 부산에서 개강했다. 이듬해 5월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자 각 대학은 부산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부산 소재 학교들도 학교 시설을 징발당한 상황에서 변변한 교사(校舍)가 있을 리 없었다. 산자락이나 공터에 천막을 치고, 나무 상자로 만든 앉은뱅이책상에 거적을 깔고 앉아 수업이 이뤄졌다.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대학과 대학생 숫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1950년 52개 대학에 학생 수는 2만9000여명이었지만, 1953년에는 57개 대학에 학생 수는 5만여명이었다. 대학생은 징집 보류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편법으로 등록만 해두고 대학에 다니지 않는 학생도 없지는 않았다. 막걸리와 소주로 허송세월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했다. 부산 피란 학교에서 공부한 50년대 초반 학번들은 이후 각 분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주역들로 성장했다. 도떼기시장 같았던 임시 수도 부산. 피란민의 삶은 고단하고 힘겨웠지만 그곳에서도 희망은 소리 없이 움트고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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