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

구리무 장사, 건어물 무역, 자동차 수리… 巨人들도 그렇게 시작했다

namsarang 2015. 3. 13. 23:49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구리무 장사, 건어물 무역, 자동차 수리… 巨人들도 그렇게 시작했다

입력 : 2015.03.12 05:47

[10] 대기업의 탄생

현대그룹 정주영 - 美8군 공사는 도맡아 따내… 한강다리 복구 수주로 도약
삼성그룹 이병철 - 사원들 투자 받아 利益배당… 1년만에 업계7위로 급부상
LG그룹 구인회 - 미군정청 무역업 許可 1호… '럭키 크림' 불티나게 팔려

1945년 광복이 되자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을 하던 구인회(具仁會·LG그룹 창업주·1907~1969)는 의령과 함안 일대 토지를 모두 처분했다. 부산을 통해 진주한 미군들이 군용 장비를 부두에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업 기회를 직감했다. 그해 11월 '미 군정청 무역업 허가 제1호'로 허가증을 받아 부산에 조선흥업사(朝鮮興業社)를 차렸다.

해인사 근처에서 화물차로 목탄을 싣고 와서 숯 장사를 하고, 일본에서 농기구를 들여와 팔았지만 이문은 보잘것없었다. 아우 정회는 서대신동의 화장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기술자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형 구인회에게 들려줬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공장을 한국인이 인수해서 화장 구리무(크림)와 머릿기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흘간 고민 끝에 구인회는 화장품 공장으로 달려가 "크림 500다스(12개를 묶어 세는 단위)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물건을 운반해 온 구인회는 다음 날 저녁 경부선 야간열차에 올라탔다. 서울 소매점에서 화장품 주문이 쏟아졌다. 서울역에서 물건을 넘겨주고 대금을 받으면 그 길로 부산으로 돌아오는 수송 작전을 폈다.

정주영(위줄 가운데) 창업주가 1940년대 직원들과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올라간 모습.
정주영(위줄 가운데) 창업주가 1940년대 직원들과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올라간 모습. /아산나눔재단 제공
삼성물산공사 시절 이병철 창업주가 전화를 받는 모습.
삼성물산공사 시절 이병철 창업주가 전화를 받는 모습. /삼성그룹 제공
구인회(가운데) 창업주가 1961년 자동 전화기 국산화에 성공한 뒤 시험 통화하는 모습.
구인회(가운데) 창업주가 1961년 자동 전화기 국산화에 성공한 뒤 시험 통화하는 모습. /LG그룹 제공
화장품 공장과 사이가 벌어지자 서대신동 70평 단층집에 제조 시설을 설치하고 직원 20여 명과 원료를 배합하는 공정을 거듭했다. 수차례 실패 끝에 1947년 냄새 향긋한 화장 크림이 생산되어 나왔다. '행운'이라는 의미로 '럭키(lucky) 크림'이라는 상표명을 달았다. 크림이 한 다스에 500원 하던 시절에, 이 크림은 두 배나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해 1월 5일 구인회는 락희(樂喜)화학공업사를 창립하고 플라스틱 빗과 비눗갑, 칫솔을 차례로 생산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이재형 상공부 장관이 들고 온 락희화학의 머리빗으로 백발을 직접 빗어본 뒤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오? 장관, 나도 이거 하나 주오."

1922년 경남 진주 지수보통학교에서 구인회와 나란히 책상을 썼던 급우가 이병철(李秉喆·삼성그룹 창업주·1910~1987)이었다. 그해 9월 이병철이 서울로 전학 가는 바람에 이들의 교우 관계는 반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돈(구인회의 삼남 자학과 이병철의 차녀 숙희는 1957년 혼인했다)이자 '재계 라이벌'로 다시 상봉할 터였다. 이병철은 1938년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250여 평짜리 점포를 사들인 뒤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열었다. 대구 청과물과 포항 건어물을 중국으로 내다 파는 무역 회사였다.

광복 후인 1948년에는 서울 종로2가 2층 건물 100여 평을 빌려 '삼성물산공사' 간판을 내걸었다. 사원이면 누구나 회사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고 투자액에 비례해서 이익을 배당받는 혁신적 운영 방식으로 1년 만에 거래액 기준으로 랭킹 7위 무역업체로 도약했다.

대기업 창업주들의 일성.

이병철은 1950년 6월 23일 주한 미국 공사(公使)로부터 미국 신형 '시보레' 승용차를 사들여 등록까지 마쳤지만, 불과 이틀 뒤 전쟁이 일어났다. 인천과 용산의 보세(保稅) 창고에 보관하던 수입품은 북한군 등에게 약탈당했다. 7월 10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자기 승용차 뒷자리에 박헌영 당시 북한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이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훗날 이병철은 "그때 나의 분한 마음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남은 재산을 처분해서 트럭 5대를 구한 이병철은 그해 12월 사원과 가족들을 태우고 대구로 내려갔다. 이듬해 1월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다시 세운 이병철은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차례로 설립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던 구인회·이병철과 달리,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및 현대자동차그룹 창업주·1915~2001)은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화전(火田) 농가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졸업이 정규 학력의 전부였고, 농사가 싫어 유년 시절에만 세 번 가출했다.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혀 돌아왔지만, 19세에 네 번째로 집을 떠난 뒤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인천 부두 하역과 이삿짐 나르기, 쌀가게 배달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미 군정청이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 일부를 불하할 때, 정주영은 서울 중구 초동 부근의 200평을 불하받았다. 그해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내걸고 자동차 수리를 시작했다.

이듬해 5월에는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더 달았다.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건설'의 출발이었다. 6·25전쟁 통에도 정주영은 아우 인영을 통역으로 앞세워 미8군 발주 공사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정주영은 "미 8군 공사는 손가락질만 하면 다 내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1957년 현대건설은 계약금 2억3000만환으로 전후(戰後) 최대 규모라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면서 도약했다.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라는 찬사와 경제력 집중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현대·삼성·LG 등 대기업은 이렇게 탄생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