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共포로 2만여명 깜짝 석방… 韓·美 동맹 이끌어낸 '이승만의 승부수'
입력 : 2015.04.16 03:06
[14] 정전협정과 포로석방
이승만, 정전협상 중 단행… 협정 깨질까 두려웠던 美, 상호 방위조약 '사인' 약속
군사분계선·정전 감시 등 초반 협상서 밀리던 유엔군
포로들에 송환 결정권 주며 '자유'란 큰 원칙 지켜내
-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 국방부의 '6·25전쟁사'는 정전 협상이 시작된 시각을 1951년 7월 10일 오전 11시로 기록한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같은 날 오전 10시에 정전 담판이 시작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서로의 기억이 다른 걸까. 지금까지 국내외 관련 연구는 이러한 시간적 차이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쌍방이 약속 시간을 정하면서 "우리들 시간(our time)인가, 아니면 당신들 시간(your time)인가"를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공산진영과 달리 자유진영은 서머타임(일광절약시간제)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북한의 조선 인민군이 6·25전쟁을 개시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는 서머타임이 적용되고 있던 서울 시각으로는 오전 5시였다.
서로 다른 시간 표준을 가지고 정전 협상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2년 18일 동안 이어질 협상이 얼마나 지난한 설전(舌戰)이 될 것인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전 협상의 세 가지 주요 쟁점은 군사분계선 획정, 정전 감시, 포로 교환 문제였다. 정전 협상장에서 회의록을 작성했던 H G 언더우드(연세대와 새문안교회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손자)는 협상 결과를 '1무 1패 1승'이라고 보았다. 언더우드의 평가는 유엔군 대표단에 후한 평가였다.
유엔군은 협상 장소 선정에 관한 협상에서부터 밀렸다. 원래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원했던 장소는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병원선(病院船) 유트란디아 호였다. 하지만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고집에 따라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이 때문에 개성에 대한 한국군과 유엔군의 군사작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38선 이남의 개성은 공산군의 전리품처럼 남게 됐다. 뒤늦게 이 문제를 인식한 유엔군 측의 요구로 협상 장소가 널문리, 즉 판문점(板門店)으로 바뀐 것은 정전 협상이 재개된 1951년 10월 25일부터였다.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왼쪽 탁자 가운데) 중장과 공산군 대표인 남일(오른쪽 가운데) 북한군 대장이 정전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협상 도중에 수석 대표를 찰스 터너 조이 중장에서 윌리엄 해리슨 중장으로 교체했던 것도 유엔군 대표단의 협상력을 저하시켰다. 이에 비해 공산군 측은 저우언라이의 심복이자 중국 공산당 정보 조직의 전설이었던 리커눙(李克農)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전 협상을 총지휘했다.
전반적으로 유엔군은 '빨리 전장(戰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줘서 협상장을 장악하지 못했다. 여론에 순응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비밀 통제에 능한 전체주의 국가와 협상할 때 나타나는 한계였다. 유엔군은 압도적인 해·공군력을 동원해서 정전 협상의 조속한 타결을 추진했지만, 공산군 측도 1952년 포로들에게 지시해 프랜시스 도드 거제 포로수용소장을 납치하는 등 배후에서 유엔군 협상단을 압박했다.
- (사진 왼쪽)1953년 6·25전쟁 3주년을 맞아 부산 미 대사관 앞에서 여학생들이 정전 협상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1953년 6월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한국 헌병들이 절단한 철조망.
첫째 쟁점인 군사분계선 문제의 경우, 언더우드는 육상 경계선만을 기준으로 '무승부'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해상경계선 설정에 있어서는 중(中)·조(朝) 인민군 대표단의 승리였다. 중·조 인민군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차이청원(紫成文)은 "정전 협정 규정에 따라 정전 이후 적(유엔군)이 철수해야 할 우리 측 주요 후방 도서는 서해안의 숙도·석도·월내도·기린도·창린도 등과 동해안의 여도·신도·웅도 등"이었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유엔군은 동해와 서해에서 이처럼 큰 양보를 했지만, 북한이 훗날 NLL(북방한계선)을 쟁점화시킬 가능성을 확실히 봉인해두지 않았다.
둘째 쟁점인 정전 감시에 대해서는 언더우드도 '패배'였다고 평가했다. 공산군 대표단은 소련을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포함시키자는 주장을 내세웠다가 이를 철회하는 대신, 압록강 이남에서 공산군 측이 비행장을 복구 증설하는 문제에서 양보를 받아냈다. 당시 중공군 비행기로 위장한 소련 공군기는 만주의 비행장에서 출격하고 있었다.
셋째 쟁점인 포로교환에 관한 협상에서 비로소 유엔군은 크고 상징적인 승리를 거뒀다. 바로 '자유'의 원칙을 지켰다는 점이었다. 전원 송환을 요구하는 공산군 측에 맞서 유엔군은 포로 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 방식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공산군 측은 송환 거부 포로들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유엔군 측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최후의 설득 시간을 요구했다. 말이 설득이지 사실은 북에 남은 가족 친지들을 거론하며 은근한 협박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통해 송환을 거부하는 조선인민군 포로들을 이러한 설득 과정 없이 석방하도록 명령했다.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광주·논산·마산·영천·부평·대구 등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송환 거부 포로 3만5698명 가운데 2만7380여 명이 석방되었다.
한국 헌병들은 미군이 경비하던 수용소의 전원을 끊고 철조망을 뚫었고, 포로들은 수용소를 탈출했다. 수용소 부근 주민들은 포로들을 맞아들여 옷을 갈아입히고 침식을 제공했으며, 탈출한 포로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한 미군의 수색망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3년간 지속된 전쟁 기간 가운데 2년간은 정전 협상이 병행된 시기였다. 이 가운데 1년 이상은 사실상 '포로 전쟁'이었다. 포로 석방을 둘러싼 양측의 외교전과 포로수용소 내 포로들의 무력 충돌을 포함하는 '이중의 전쟁'이라는 의미다. 이승만 대통령이 송환 거부 포로들을 대거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공산군 측은 정전 협상을 중단하지 않았다. 또다시 한국의 단독 행동으로 정전 협상이 무산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미국은 서둘러 한국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이승만이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부터 주창했던 사안이었다. 그 결과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10여일 후인 8월 8일 경무대(청와대)에서 한·미 상호 방위조약 가조인(假調印)이 이뤄졌다.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고래와 새우 간의 동맹'이 성사된 것이었다.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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