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3주일 (루카 24,13-35)
사랑하는 만큼 어둠은 걷히고
| ▲ 정연정 신부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
알렐루야! 부활 제3주일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사랑은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하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라고 새겨주셨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6항) 그러므로 우리 안에 사랑이 커질수록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우리를 환히 비출 것입니다.
1. 그들은 눈이 가리어(루카 4,16)
조선 시대의 문장가였던 유한준(1732~1811)이 남긴 시 일부입니다. “知則爲眞愛(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 愛則爲眞看(사랑하면 곧 참으로 보게 되고).” 이를 토대로 유홍준 교수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멋진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 보면, 이미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루카 22,54-62 참조) 사도 베드로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무법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사도 2,22-24.32 참조)이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사도 2,21)고 “목소리를 높여 증언”(사도 2,14.32 참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극적인 반전은 십자가를 통해 계시된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2.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하루는 스승이 제자들에게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여러 제자가 제 나름대로 대답을 내보았지만, 스승이 기대했던 것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스승은 “너희가 어떤 남자나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 사람이 너희 형제나 자매라는 것을 알아볼 때가 바로 그때다. 너희가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도 밤이기 때문이다”라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1베드 1,17 참조)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을 두게 된”(1베드 1,20-21 참조)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1베드 1,19)로써 어둠의 헛된 생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3. 눈이 열려 알아보았다(루카 24,30 참조)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는 「프로스로기온」에서 “나를 형성하시고 또 변모시키신 내 주 하느님이시여, 갈망하는 내 영혼에게 당신은 내 영혼이 본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환히 보게 해 주소서”라고 간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스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일을 겪고서 침통한 마음으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된 감격스러운 체험’(루카 24,30-32 참조)을 전해줍니다. 저는 “오늘 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참조)라며 예수님을 붙들었던 그 시점부터 두 제자에게 심안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묵고 싶은 마음’이 일도록 “가까이”(루카 24,15) 다가오십니다.
4. 사랑하는 만큼 보게 되는
12세기의 철학자며 신학자였던 생 빅토르의 리카르도(Richard de St. Victor)는 “사랑이 있는 곳에 눈길이 머문다(Ubi amor, ibi oculus)”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표현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마음과 시선이 향하게 되기 때문에,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고 참으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의 부활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때문에 사랑 없이는 부 활신앙을 살 수 없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더 타오르길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5-21 참조)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