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연정 신부 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님의 날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례에 참여하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한다”(「전례 헌장」 106항 참조)고 선언합니다. 모름지기 성찬례야말로 교회의 선교와 삶에 있어서 원천이며 절정입니다.
기억하여라(신명 8,3)
언젠가 교구 선배 신부님이 피정 강론 때에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우리 사제들이 평생토록 미사 중에 영하게 되는 성체의 높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축성하기 전의 제병의 두께를 1㎜라고 가정해 본다면, 만 5년(1825일)이면 그 높이가 무려 1.825m에 이를 것입니다. 거의 우리 키보다 더 높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제들은 신자들과는 달리 더 큰 성체를 모시게 되니,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 땅의 종살이, 불 뱀과 전갈이 득실대던 광야, 메마른 땅의 차돌 바위에서 솟아난 물,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은 일”(신명 8,14-16 참조) 안에 함께 하신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깨우쳐줍니다. “시간은 망각을 낳고, 기억은 그 망각을 지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기억할 때 믿음은 굳건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한 몸(1코린 10,17 참조)
오스트리아 출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R. M. Rilke)가 쓴 ‘눈을 감기세요’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내 눈을 감기세요. /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으세요. /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 시는 절절한 사랑이 일으키는 변화를 잘 묘사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코린토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하는 것”(1코린 10,16 참조)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여럿일지라도 한 몸”(1코린 10,17)으로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일치하여,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의 ‘눈, 귀, 발, 입’을 내어주는 증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분명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15)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릅니다. 친교는 바로 닮음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모시면서, 그분처럼 됩니다. 그러므로 ‘예’라는 응답, 즉 헌신(獻身)하는 믿음이 요청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 조상들이 살려고 먹었지만, 결국은 죽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요한 6,58 참조)라고 밝히십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주님의 자비와 은총의 선포입니까? 사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참 생명의 빵’을 ‘알고, 맛보고, 누리게’ 되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이시며 몸이신 온전한 그리스도(Christus totus)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찬례 거행이야말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활동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사랑의 성사」 36항)
교형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 영원히 살 것’(요한 6,53-58 참조)이라는 ‘너무나도 넘치는 구체적인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더욱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보여주신 은총으로 더욱 새로워지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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