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해설

로마서 2장 - 하나님의 심판

namsarang 2017. 9. 2. 17:32


 로마서 2장-하나님의 심판 



2장: 하나님의 심판 


1-16절,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심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의로운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이 판단의 행위에서 그는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동일한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의 양심은 자신도 정죄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2,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남을 판단하는 자이든지 판단을 받는 자이든지 간에, 불의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 그대로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진실한 판결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악을 행하는 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4, 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의 회개를 위함인 줄 알지 못하고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 그러한 자의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함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마지막 심판날 그에게 임할 진노를 쌓는 것뿐이다. 이와 같이,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들보다 더 악하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온다. 그 날은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의 미래의 사건이다. 여기에 복음의 두 번째 큰 전제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두 개의 큰 전제(前提)가 하나님의 의의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필요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것은 인류역사 시초로부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원리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해서 선을 행하고 자기가 원해서 악을 행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선이나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가 행한 대로 그리고 자기가 행한 만큼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불평할 정당한 이유가 조금도 없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사람이 선을 행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했다(갈 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영생의 나라, 곧 신천 신지(新天新地)의 천국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면 그는 영생에 이를 것이다. 사람은 율법에 계시된 선한 말씀들을 온전히 행할 때 영원히 살 것이다. 그것이 율법에 계시된 공의의 원리이다. 신명기 4:1에는,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라고 말씀했다.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인들 속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 세상적인 욕심과 야망이 있다. 그들은 인생의 존귀성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헛된 세상의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당을 지어'라는 원어는 '당파심으로, 다투어'라는 뜻이다. 이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 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영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곤고'라는 원어(스테노코리아)는 '곤경, 심한 고생'이라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이게 그의 영혼에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게 된다.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에 다 적용되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 적용된다.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보편적이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다 적용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 조건, 예를 들어 가문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직업이나 학력 등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증거는,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사실에 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율법을 아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 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과 같다.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씀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히 6:1, 2). 심판의 진리는 두려운 진리이지만, 복음의 기본적 내용으로서 밝히 증거되어야 할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의 주가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신 판단'이며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심판이라는 사실이 5절, 6절에서 이미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드러난 행위들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은밀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17-29절, 유대인의 잘못 

[17-20]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 중에 지도적인 인물을 대표적으로,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는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21-24]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으로 인해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목사, 장로, 전도사, 권사, 집사 등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우리 주위에 사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자. 직분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인격과 삶임을 깨닫고 선한 인격과 삶을 위해 기도하고 힘쓰자. 

[25-27]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유익하고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거꾸로 생각한다면, 무할례자가 율법의 의(義)를 지키면 그의 무할례가 할례로 간주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본래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할례와 무할례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28, 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함이니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외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외적인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마음의 할례가 참된 할례이다. '신령에 있고'라는 말은 '영에 있고' 혹은 '성령으로 말미암고'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도 마음의 할례를 가르쳤었다. 신명기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예레미야 4:4,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마음의 할례란 마음의 모든 불결과 강퍅함을 베어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로워지는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여기에 진정한 기독교의 한 기본적 원리가 제시된다. 즉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요 내면성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음의 변화, 모든 죄악된 마음의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짐을 가져오는 것이다. 참 경건은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2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 앞에서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함의 강퍅을 부리는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쌓는 것뿐임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바로 알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은밀한 행위들까지 다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 신앙 생활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깨닫고 심령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자.

출처 : http://www.lavcsc.com/zbxe/index.php?document_srl=3316&mid=rom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