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게시판

백범(白凡)에 대한 오해와 진실

namsarang 2009. 6. 16. 21:46

백범에 대한 오해와 진실

통일 대한민국' 꿈꾼 건국의 지도자였다

  • 이화여대 신용하 석좌교수·백범학술원장

백범(白凡)에 대한 오해와 진실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오해가 많은 것 같다. 우선 백범을 '좌파'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백범은 독립운동 시기나 광복 후 건국 시기나 시종일관하여 민족주의자였으며 '우파'의 영수였다. 백범이 1948년 4월 남북협상 차 육로로 평양에 갔을 때, 백범이 지나가는 길목에 '김구·이승만 타도'라는 구호가 도처에 다수 남아 있었다. 북한측에서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벽보였다. 그들은 백범을 이승만과 함께 '우파'의 최고 영수라고 본 것이다.

다음은 백범을 '테러리스트'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지휘한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가 '테러'라는 것이다. 이것도 백범에 대한 모독적인 오해이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해를 불법침략하여 점령해버린 '상하이사변'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 조계에 설립돼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특공대'(특무대 독립군)를 만들어 일본군의 침략에 적극 대항 응전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백범에게 위임했다. 임시정부 '특공대'로 조직된 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었다.

백범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로 상하이 점령 일본군사령부 사령관 시라가와 대장 이하 군·정 수뇌 7명을 섬멸한 대전과(大戰果)를 올렸다. 일본 육군성은 시라가와의 사망을 놓고 테러에 의한 '공무 사망'인지, 적군과의 전투에 의한 '전사'인지를 놓고 고민한 끝에 1932년 9월 전사(戰死)로 결정했다. 일본은 윤봉길의 투탄(投彈)을 "만주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편의대원(민간복장을 한 특공대원)의 공격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시라가와가 임시정부의 특공전투로 전사한 것으로 처리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테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남·북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먼저 '남북협상'을 해보자고 주장하며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것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참으로 큰 오해이다.

백범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한민국 건국을 추진하고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백범이 주도하여 1941년 11월 반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이다. 이 건국강령에서 호칭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광복 후 서울에서 건국될 '대한민국'이었다. 백범에게 독립운동은 그 자체가 또한 건국운동이었던 것이다.

백범은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통일 대한민국'으로 건국돼야 내전(內戰)을 방지할 수 있지, 남·북한에 각각 2개 정부를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북에서는 '남진(南進) 통일', 남에서는 '북진(北進) 통일'을 내세우면서 단독정부를 세우면 동족상잔의 참혹한 내전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큰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었다. 백범은 남북협상 때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만일 북한측이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것도 단호히 반대한다고 역설하면서,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정부로 시작하자고 강조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통일 대한민국의 건국을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추진한 대한민국 건국지도자이다. 백범은 칠십 평생을 오직 한국 민족과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근대 최고의 애국자이고 민족의 큰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