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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경은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물 확실

namsarang 2009. 6. 12. 19:34

[Why]

다라니경은 세계 최고(最古) 목판인쇄물 확실

                                                                                                                             -유석재 기자-

 

처음 다보탑에 넣었다가 약 300년 뒤 수리하면서 석가탑에 옮겨 연대 혼동

불교서지학 전공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 연도는 통일신라 때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4월 8일자 보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이 수리 때문에 해체되던 1966년 10월 탑 2층 안에서 유물 한 점이 발견됐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 흔히 '다라니경'이라 불리는 이 경전은 8세기 초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다라니경'이 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논란이 일어났을까? 2005년 9월 '판도라의 상자'라는 별명이 붙은 석가탑 '묵서지편'의 존재가 밝혀졌다. 1966년 탑 안에서 발견됐던 이 종이 뭉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39년 동안 창고에 묵혀 두고 있었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 안에서 발견돼‘세계 최고(最古) 목판 인쇄술’로 국사 교과서에 실린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최근 학계의 연구결과 제작 연대를 서기 751년에서 740~742년으로 더 올려 잡을 수 있게 됐다. /연합뉴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문서에 11세기에 작성된 석가탑의 중수기(重修記)가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8세기에 만들어진 석가탑이 20세기까지 한 번도 중수된 적이 없다는 믿음이 깨진 것이다. 그렇다면 '다라니경' 역시 고려시대 수리 당시에 새로 만든 것을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2007년 3월 묵서지편의 내용 일부가 공개되자 의문이 커졌다. '서기 1038년에 무구정광다라니경 한 권을 탑에 넣었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다라니경'이 1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의 자리는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770년)이 차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신라나 고려 때 제작됐을 가능성이 반반"이라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측의 반응은 세간의 의혹을 부채질했다. 발칵 뒤집힌 학계는 판독과 연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 '다라니경'을 고려 때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했던 고졸한 서체이고 ▲종이도 신라 특유의 닥종이이며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집권기인 690~704년에만 쓰였던 한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중수기가 두 번에 걸쳐 기록됐다는 것도 밝혀졌다. 1024년의 '불국사 무구정광탑 중수기'와 1038년의 '불국사 서(西)석탑 중수형지기'가 묵서지편에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석가탑을 두 번 중수한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왜 같은 탑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그런데 남동신 서울대 교수가 뜻밖의 주장을 했다. 1024년 중수기의 해체 기술 부분에서 '앙련대(연꽃 모양의 부재)' '화예(꽃술 모양의 기둥)' '통주(대롱 모양의 기둥)'라는 부재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석가탑이었을까? 옆에 있는 다보탑의 형상과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이어 최연식 목포대 교수와 한정호 동국대 전임연구원이 "1024년은 다보탑 수리, 1038년은 석가탑 수리 기록"이라고 분석함으로써 이 설은 힘을 얻었다. 하지만 왜 다보탑 중수기가 석가탑 안에 들어 있는 것일까?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최근 논문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을 통해 "1038년 석가탑 중수 때 14년 전의 다보탑 중수기를 옮겨 석가탑에 봉안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 "다보탑 내부의 안치 공간이 좁아 그곳에 있던 '다라니경'과 함께 석가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니까 석가탑의 '다라니경'은 1038년 이전까지는 원래 다보탑에 있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박 원장은 1024년 중수기에서 원래 탑에 있던 사리를 담는 용기(사리장엄구)와 그 내용물을 언급한 부분에서 2종류의 '다라니경'이 있었다고 돼 있지만 1038년 중수기의 같은 부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원래 다보탑에 '다라니경'이 있었지만 석가탑에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1024년에는 다보탑만 수리했는데 1036년 지진으로 탑이 붕괴 위험에 놓이자 1038년에는 두 탑을 모두 수리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이 때 다보탑에 있던 '다라니경' 2종 중 1권을 빼내 새로 석가탑에 집어넣은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다라니경'은 다보탑 창건 당시인 신라 때 것이 맞는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1038년에 새로 만든 '다라니경'을 집어넣었을 가능성은? 박 원장은 "고려시대는 이미 탑에 봉안하는 경전이 훨씬 대중적인 '보협인경'으로 바뀌었을 때고 중수 당시에는 새로 '무구정광다라니경'의 소형 목판본을 간행할 이유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다보탑·석가탑의 창건 연대를 740~742년으로 기록한 중수기로 인해 오히려 '다라니경'의 간행 시기는 기존의 751년에서 9년 이상 올라가게 됐다. 분명한 것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기술을 고칠 필요가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 해체 수리 당시 탑 안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묵서지편.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