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신자들이 결성한 '대한의민단' 활동 사료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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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작성한 「만주지역 본방인 재류금지(在留禁止) 관계잡건」에 첨부된 천주교 소속 독립운동가들 사진. 왼쪽부터 박창래, 정풍산, 김병원, 김명세, 오지화. | 만주지역 천주교 신자들의 무장 항일단체로 알려진 대한의민단의 구체적 활동을 보여주는 사료가 공개됨으로써 일제강점기 간도 천주교 항일운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가 13일 일본 외무성 문서를 번역, 발간한 「만주지역 본방인 재류금지(在留禁止) 관계잡건」에 따르면 박창래(朴昶來)는 "1920년 연길현 차조구에서 동지 방우룡(方雨龍) 등 천주교도들을 규합해 간도에 거주하는 신자 3000여 명을 망라하고, 조선 거주 신도를 일단으로 하여 한족 독립을 달성하고자 대한의민단이란 비밀결사를 창설"한 사유로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관련기사 5면 본방인 재류금지란 재만주 일본 총영사관이 관할지역 독립운동가를 지칭하는 소위 '불령선인'에 대하여 거주금지 처분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 사료는 또 "정풍산(鄭豊山)ㆍ김병원(金秉源)ㆍ김명세(金明世) 3인은 대한의민단에 몸을 던져 흉기를 휴대하고 은밀히 용정촌에 잠입하여, 천주교회당을 본거지로 삼아 우리(일본) 영사관 경찰서의 엄중한 경계선을 피해 군자금을 강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7살 오지화(吳芝華)의 재류금지 처분 사유도 "1920년 5월 무렵부터 불령선인 방우룡(方雨龍) 등을 수령으로 하여 조직된 독립의군이라 칭하는 비밀결사에 가맹하고…"라고 적시돼 있다. 대한의민단의 존재는 이미 교회 사학계에 보고된 상태지만, 정부기관에 의해 천주교 신자들의 구체적 항일투쟁 기록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서 의미가 깊다. 윤선자(전남대 사학과) 교수 연구논문에 따르면 의민단은 무장병력 300명, 군총 400정, 권총 50정 정도로 무장한 천주교인파(天主敎人派) 무장단체다. 방우룡은 북간도 명월구본당 신자로서, 단원들 가운데 교우촌 청년 100여 명을 이끌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한 소명월구에 있던 방우룡 집과 천주교회 건물이 제1군사령부로 사용된 기록으로 미뤄 당시 간도 천주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조직적으로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사료는 북간도 천주교 항일투쟁의 핵심 인물이 박창래와 방우룡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일제는 박창래를 '천주교도들을 규합하여 대한의민단을 창설한 인물', 방우룡을 '독립의군 수령'이라고 지목했다. 간도 용정 출신인 고 한도준(1998년 선종) 신부는 1993년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1929년 신학생 시절 방학을 이용해 명월구성당에 가서 신자 독립단을 이끌던 박창래 사목회장과 방우룡씨를 만나 청산리전투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무관 출신인 방우룡은 키고 크고 목소리가 우렁차 국민학생들이 '방우레'라고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윤선자 교수는 "대한의민단 관련 기록은 천주교가 일제강점기에 민족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세간의 지적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사료"라며 교회 차원의 심층연구와 재평가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항일 무장 투쟁 당시 간도 천주교회사와 독립운동 활동 | |
독립군 군자금 모금에 깊숙이 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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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지역 천주교 신자들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며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했다. 사진은 1920년대 '간도 신앙의 못자리'라고 불린 팔도구성당과 마을 풍경. |
일제 수탈을 피해 북간도로 올라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천주교인들이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만주지역 본방인 재류금지(在留禁止) 관계잡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이 사료집에 따르면 간도지역 천주교 청년들을 모아 대한의민단을 결성한 박창래(당시 36살)는 군자금 모금 책임을 맡아 용정에서 주로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돼 3년간 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오지화는 "무기구입 자금모집을 분담하여 당원 신대용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용정촌 부근에서 기부금 강요에 힘써온 인물"로 기록돼 있다. # 간도 천주교회, 만주 독립운동의 근거지 이 같은 활동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간도지역 천주교회사를 살펴봐야 한다. 간도는 영토상 중국에 속해 있었지만(논란 중인 1909년 청ㆍ일 간 간도협약이 유효하다는 전제로) 교회는 조선대목구에서 파견된 외국 선교사들 도움으로 성장해나갔다. 신자들은 싼값으로 비옥한 토지를 매입해 농사를 지은 덕분에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했다. 한 예로 1919년 팔도구에서 최문식 신부가 마적떼에게 납치된 것을 비롯해 공소 신자가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 지역 신자들은 거뜬히 큰 돈을 만들어 교우를 찾아오곤 했다. 교세(1928년)도 천주교 신자는 1만2257명으로, 장로교 신자수에 비해 두배 이상 많았다. 즉 간도 천주교회는 간도의 3ㆍ13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이 지역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간도 천주교인들의 독립운동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성당 정오 삼종기도 종소리에 맞춰 시작된 이 만세운동은 천주교ㆍ개신교ㆍ천도교 등 북간도 종교단체 인사들이 참여한 조선독립의사회가 주관했다(한국민족운동사료 3ㆍ1운동 편). 이때 천주교 신자촌인 대교동 향교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장백현 신자 30여 명은 혜산에 있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했다. 간도 천주교인들은 대한의민단뿐 아니라 왕청현에 근거를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신민단에도 참여했다.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신문(1920년 1월 26일자)은 "28개 공소와 수천명 신자수를 헤아리는 천주교 무리 중에 안중근과 같은 무명의사가 많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 청산리전투 무기조달에 결정적 기여 이와 관련해 고 한도준 신부가 평화신문(1993년 8월 15일자)을 통해 증언한 내용은 간도 천주교 독립운동을 매우 구체적으로 전하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교우촌 신자들은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열심히 지원했다. 세린하라는 동네에 살 때 공출 책임자였던 부친은 낮에 교우집을 돌며 식량 옷 돈 등을 거둬 두었다가 야밤에 장총과 육혈포를 찬 독립군이 오면 건네주곤했다. 특히 두만강 근처 세관에 근무하던 한윤화(시몬)가 청산리전투 무기조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독립군이 무기가 부족해 애태울 때, 회령에 도착한 일본 무역상 돈이 마차에 실려 용정으로 올라갈 예정이라는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겼다. 독립군은 오랑캐고개에서 그 마차를 습격, 돈 궤짝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러나 대한의민단은 이후 일제의 노골적 종교탄압과 중국 공산당 출현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 한인들 독립운동이 격렬해지자 일제는 신앙자유 불간섭에서 종교탄압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또 마적과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도 상황이 악화되자 천주교인들은 교회 보호와 유지를 위해 한 발 물러서야 했다. 당시 한국교회를 관할하던 파리외방전교회는 독립운동을 정교분리원칙 위반으로 보고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하는 입장이었다. 윤선자(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간도교회 독립운동은 당시 교회의 일반적 상황이 정교분리론에 의해 일제 침략에 무관심하도록 유도된 사실과 대비해볼 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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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사료 「만주지역 본방인 재류금지 관계잡건」은 간도 천주교회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교회로서는 이 사료의 발굴, 공개가 여간 반갑지 않다.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된 일제강점기 천주교회는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족의 고난에 무관심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대한의민단 활동에서 밝혀졌듯, 이 시기에도 평신도들의 선각자적 항일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안중근(토마스) 의사는 신앙적 확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서울ㆍ원산ㆍ신의주 신자들은 거리로 뛰어나가 3ㆍ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애국계몽운동 업적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묻혀 있다는 데 있다. 간도 항일운동만 하더라도 신자들이 일제 수탈을 피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해서 일군 자랑스런 역사임에도 그동안 연구ㆍ평가 작업에 소홀했다. 이는 엄연히 우리 교회사의 일부분인데도 성직자 평신도 가릴 것 없이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의민단 독립운동도 윤선자 교수가 이미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밝혀놓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논문은 사장(死藏)돼 있다. 또 올해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인데도 교회 안에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우리 역사에 무관심한 채 외부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는 한 조직체의 정신이자 미래로 가는 지도다. 지금이라도 묻혀 있는 항일운동 사료를 발굴, 재평가해서 후손에게 떳떳한 역사를 물려줘야 한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