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미경·히로시마
- 평화연구소부교수
영국 시인 T.S. 엘리엇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면 우리에겐 8월이 잔인한 달이지 싶다. 8월 29일은 나라를 잃어 역사의 개기일식이 시작된 수치스러운 날이고 8월 15일은 주권을 회복하여 빛을 다시 찾은 광복의 날이다. 두 주 간격으로 기쁨과 아픔이 교차하는 이달엔 과거·현재·미래가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히로시마 집에 있는 세 종류의 달력 중 8월 15일에 관한 설명이 있는 달력은 한 부도 없다. 바다의 날, 히로시마평화기념일, 입추, 칠석 등 조금이라도 기념이 될 만한 날들은 모조리 인쇄한 동네 수퍼 달력에도 8·15는 단지 8월 셋째 토요일일 뿐이다. 종전기념일, 하다못해 종전일(終戰日)이라고 쓴 달력조차도 없다. 한국에선 '빛을 다시 찾은' 광복절(光復節)인데 말이다.
8월 29일의 기억은 한국, 일본 두 나라 모두 역사에서 지우고 싶어하는 분위기다. 한국에선 열강의 힘 다툼에 굴복당한 국치일(國恥日)이라 그렇고 일본에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한 쓰라린 역사의 연장이라서 그렇다.
군국주의 치하에서 고달프게 살았던 일본인들의 패전에 대한 생각은 무척 복잡하다. 건장한 국민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전쟁터로 불려나갔고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 전쟁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단자로 내몰렸으며 오키나와에선 섬주민들이 집단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했었다. 도쿄공습의 와중에도 불구덩이에서 일왕의 사진을 꺼내온 사람들은 영웅대접을 받을 정도로 북한의 전체주의와 비슷한 점이 많았던 군국주의 일본의 패전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국민들은 차라리 해방된 아이러니를 낳았다.
경술국치의 비극에 고종황제의 조언자인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대한제국 국민들을 믿는다"며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예견했었다. 야멸친 동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은 계속되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결국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자유를 맞게 된다.
이 과정을 좀 씁쓸해 하는 일각의 시각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필자가 수년 전 실시한 한국인의 역사적 수치심과 자긍심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이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또 한글창제와 88서울올림픽이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립에 관해선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유는 대한독립을 우리 힘만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열강 간의 힘 싸움에서 어부지리로 얻었다는 거였다. 이런 자기비하적인 인식 뒤엔 1910년 한일합방이 조선의 약함 때문이었다는 판단도 배경에 깔려 있다.
이런 인식은 불필요한 자학이다. 조선은 적자생존의 원칙이 판치던 19세기의 무시무시한 국제질서 속에서 끝까지 견뎌냈기에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 외압을 견뎌내지 못해 사라져 버린 오토만 제국과 프러시아 같은 나라들도 있지 않은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던 일본제국의 등등한 기세 속에서 3·1독립운동으로 뿌린 저항의 씨앗은 상해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그 정신을 이어왔다. 일제는 조선의 저항이 다른 식민지보다 강해 더 억압적인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고개 숙이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은 생존의 노하우로 읽힌다.
한반도는 주변국의 무수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렇게 당당하게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통일 신라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긴 역사 앞에서 수치스러운 36년은 아주 짧은 세월일 뿐이다.
한국인들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오느냐고 해외의 지인들이 가끔 물어온다. 한반도 주변국들은 아시아를 지배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들이라 이들의 초조함과 경쟁의식은 이해가 되지만 한국인들의 자신감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나는 살아남는 일엔 일가견이 있는 생존의 달인들의 체험적 낙관성으로 그 자신감을 설명한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온 역사의 유전자가 꿈틀거리는 희망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엮고 있다고. 그래서 웬만한 어려움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체험적인 희망을 품고 산다고.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내년엔 조금 덜 자학하고 조금 더 많이 매진하는 한국이 보고프다. 나라를 잃고 또다시 찾은 8월,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 온 우리의 유전자를 믿고 일류 국가, 일류 국민으로 자리매김하는 모국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T.S. 엘리엇의 4월은 영원히 잔인한 달로 머물지라도 우리의 8월은 역사 속에서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