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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의 아버님 산소에는 1970년까지 묘석이 없었고…"

namsarang 2009. 8. 17. 17:54

[최보식이 만난 사람]

"국립묘지의 아버님 산소에는 1970년까지 묘석이 없었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양자(養子)' 이인수 박사
양자 구할 당시의 조건은 대통령의 나이가 많아 대졸(大卒)에 미혼이어야 하고
영어 가능해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고국에 가져가야지"라며
하와이 망명 시절에 화초에 물주며 말하시기도

 

서울 종로구 이화장(梨花莊)의 문은 닫혀 있다. 대문 안쪽 경비실에 공익근무자가 있을 때만 연락이 된다. 땡볕에 초인종을 계속 누른 지 10분 만에 문이 열렸다.

"당초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다. 하지만 숭례문 화재가 있은 뒤부터 문을 닫고 있다. 예약을 받거나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들여보낸다. 여기에는 관리나 경비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

시원한 차림으로 있던 이인수(李仁秀) 박사는 금세 '노신사'가 됐고, 손님을 위해 에어컨을 켰다. 그는 '논란 많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양자(養子)다. 그는 78세다.

"처음에는 본채(기념관)를 생활공간으로 썼다. 목재가 썩어 벌레가 생기고 무엇보다 추웠다. 어머님이 밤에 주무시지를 못했다. 그래서 1985년 지금의 사택을 지었다. 돈이 없어 정일권(丁一權) 전 총리에게 부탁해 건축업자들에게 철근· 시멘트 자재들을 기증해달라고 했다. 이렇게 주거를 옮기고 나서 1988년 3월 26일 아버님 생신날에 맞춰 기념관을 열었다."

                  ▲ 한 가정집에 방치된 '잘린' 이승만의 동상.

―왜 하필 그해에 개방하게 됐나?

"그해가 대한민국 건국 40주년을 맞는 해인데 건국에 대해 아무런 말도 없이 지나갔다. 솔직히 그전까지 우리 유족은 먹고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아버님에 대해 너무 모르니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우선 이화장을 공개하기로 했다. 당시 생존해 계신 어머님(프란체스카)을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개방했을 때는 인파가 몰렸다."

이화장의 총 면적은 1천800평이다. 이승만이 생전에 살았던 본채, 첫 내각진용을 짰던 조각당(組閣堂)·사택·동상·잔디·수목 등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누가 어떻게 관리 운영해왔나?

"유족이 관리해오고 있다. 내가 받은 교수퇴직금과 독립운동 유가족 연금(매달 140만원)으로 꾸려왔다. 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충분하게 잘 관리를 못했다. 지난 4월 이화장이 국가문화재로 승격됐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껏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전혀 못 받았다는 뜻인가?

"지붕에 비가 새거나 허물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준다. 가끔 정원의 수목 관리를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관리를 위한 재정 보조는 없었다. 여기에 관리인 한명을 두고 있는데 개인 돈으로 월급을 줘왔다. 방문객들 차 대접, 식사 대접도 사비로 한다. 지방에서 후원자들이 쌀 마늘 과일 등을 보내준다. 외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아내가 운전기사 노릇을 해오고 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1992년) 전에는 대통령 유족 연금과 운전기사, 차량유지비가 나왔지만 모두 끊겼다. 바로 엊그제는 종로구청으로부터 3천100만원 재산 압류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화장 안에 도로용지가 포함돼 우리가 그 사용료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꼭 필요한 것은?

"전시할 공간이 좁다 보니 본채의 처마 아래까지 사진들을 내걸어놓았다. 내부에는 습도 관리가 안 되고 벌레가 인다. 유품을 보관할 수장고도 없다. 세계 어딜 가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1947년 이화장에 들어와 살았다. 당시 지지자들이 모금을 해서 사준 것이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건국정부를 조각했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경무대로 들어갔지만, 대통령 하야 직후에도 한달간 여기서 살다가 하와이로 떠났다.

―어떤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됐나? 기록을 보니 1961년 이 대통령의 하와이 시절에 양자로 입적됐다. 그때 이 박사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는 서른살의 성인이었다.

"아버님은 원래 이기붕 부통령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맞아들였지만 4·19 직후 그 일가족이 동반자살했다. 그래서 하와이에 망명한 뒤 조상을 모실 아들이 없음을 한탄했다. 옛날에는 '후사가 없는 것보다 더 큰 불효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함께한 이순영씨가 국내로 와서 '이씨 종중(宗中)에서 양자를 천거하라'고 했다. 대통령의 연세(당시 86세)가 많으니 대학졸업한 사람,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이고 좋은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종중에서 찾다가 내게 연락이 왔다."

―양자를 선뜻 받아들였나?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더 좋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순영씨가 '전주 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의 말년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 하와이에서 이 어른이 얼마나 기다리시겠는가'라고 해, 결국 설득당했다. 경기도 양주군의 초대 교육감이었던 친부(親父)는 내 결정에 가타부타 말씀이 없었다. 다만 '정말 어려운 자리라 앞으로 네 삶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만 했다."

―하와이까지 가서 대통령을 면담하고 양자 입적이 됐나?

"하와이와 편지 왕래를 통해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면담 없이 입적이 된 뒤 나는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화장에 와보니 지붕의 양철 물받이가 다 썩어 있었다. 아버님이 1948년 경무대로 들어가실 때 '청백리는 자기가 관직에 있을 때 자기 집을 안 고쳤다. 이화장은 내 사저이기 때문에 내 허락 없이 집을 못 고친다'고 해서, 비 새는 것만 막았다. 더 가관인 것은 세간살이가 텅 비어 있었다. 아버님이 하와이로 떠난 뒤 민주당 정권이 이화장 집기들을 트럭으로 싹 싣고 가버렸던 것이다. 이것들은 1969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썩고 망실돼 있었다. 지금 기념관 전시물이 그때 남은 것들이다."

―1961년 말 하와이에 가서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말이 오갔나?

"내가 큰절을 하니, '잘 왔다'고 좋아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게 있는지, 우리는 몇 십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 같았다. 그때는 5·16으로 이미 민주당 정권이 무너진 뒤였다. 아버님은 군사정권의 성격에 대해 잘 몰랐다. '우리나라 형편이 어때?' 첫 물음에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반공(反共)을 한다고 하니 잘 될 거라고들 합니다' 답하니, '남이 잘 되어 간다는 말을 믿지 마라. 내가 그런 말 믿다가 이래 됐지 않았나' 하셨다.

3·15부정선거가 있고서 4월 12일 '각료 회의록'을 보면, '선거에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아버님이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만일 선거가 잘못됐다면 내가 물러나야지' 말하는 게 나온다. 집권 말년에 당신이 얼마나 속았는지를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설령 속임을 당했다 해도 그건 대통령의 책임이다. 이미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가 왔는데도, 왜 장기집권에 집착했을까?

"한일회담만은 당신이 하려고 했던 것 같다(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 협상에서 강경해 미국측의 애를 태웠음). 선거 전에 자유당 당료들에게 '그것 하나는 내가 끝내고 그만두는 게 좋은지'를 물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해준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집은 어떠했나?

"침실 두개의 작은 목조 주택이었다. 주변에 아는 분들이 생활할 수 있게 중고가구들을 갖다 줬다. 이화장 기념관 안에 첫날 아버님과 함께 식사했던 작은 식탁을 갖고와 전시해 놓았다. 그 집에서 일년쯤 살다가 귀국이 좌절된 뒤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하와이에서 체류할 때는 어머님의 친정에서도 매달 200달러씩 생활비를 부쳐왔다."

―하와이에서 이 대통령의 하루 일상은 어떠했나?

"이미 연로해서 어머님이 짜준 시간표에 맞춰 규칙적으로 지냈다. 한번은 오후에 화초에 물을 주시면서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고국에 들어갈 때 가져가야지' 하셨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곧 들어갈 줄 알았다. 아버님은 '내가 얼마 안 있으면 죽어. 한국 가서 죽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해서, 대국민사과문도 발표했다. 1962년 3월 17일 귀국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때 담당 의사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왜 귀국이 좌절됐나?

"사과 성명까지 했으니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다. 우린 비행기 표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새벽 이화장 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하와이에 전화해 이화장에 불을 지를 거니까 오시지 말라고 해라'고 협박당한 것이다. 그 전화를 받고 얼마 뒤 호놀룰루 총영사가 집으로 와 '귀국 연기를 하라는 지시가 왔다'고 전했다. 아버님의 얼굴이 하얘졌다. '누가 우리나라를 이끌든 간에 정말 나라를 위해 잘해주길 바라오'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때부터 걷지를 못했다. '나도 6·25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군사정부가 이럴 수 있나'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나 혼자서 들어왔다."

―다시 하와이로 간 것은?

"1964년 어머니로부터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내 뼈를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미국서 화장을 할 테니 네가 유골을 안고 종친회 선영에 묻어라'는 편지를 받았다. 내가 하와이로 가서 '정부가 아버님을 버렸지 국민이 버린 게 아니다. 국립묘지에 묻히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탄원서를 냈다.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국측의 '메시지'를 받고서 허락이 떨어졌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밤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서거했고, 그해 7월 23일 그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장'보다 격이 낮은 '국민장'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유족들이 '가족장'을 택한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서거(逝去)'라고 쓴 신문이 없었다. '운명(殞命)'이라고 썼다. 그게 정부 입장이었다. 정부가 국민장으로 장례절차를 장악해 축소시키려고 했다. 반발 세력을 동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나라를 만든 건국 대통령으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욕먹을 이유가 없다 싶어 가족장을 고집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만약 국립묘지에 못 들어갈 경우 어떻게 할까' 하고 어머님께 물으니, '그러면 유해를 한강물에 띄운다고 해'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나는 더욱 박정희 정부의 눈밖에 났다."

―현재 국립묘지 내 묘석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되어 있다. 당시에는 어떠했나?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1970년까지 아버님 산소에는 묘석이 없었다. 어머님이 '서양에서는 죄인의 묘 말고는 묘석이 없는 산소가 없다. 우리가 죄인이냐'고 억울해했다. 그 얘기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듬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라는 묘석이 세워졌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998년 합장(合葬)하면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새겼더니, 김대중 정권에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라는 묘석을 세웠다. 미리 새겨놓은 묘석은 아버님 묘 옆에 묻었다. '건국대통령 묘비'는 땅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언제 결혼했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은 오스트리아의 친정에 가 계셨다. 그러면서 '네가 손자를 보면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1968년 결혼했고, 다음해 아들을 낳자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느 정권에서 가장 힘들었나?

"단국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1972년 어느 날 대학측에서 나를 불러 '그만두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정권 아래 살지 않겠다며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이화장을 지켰다. 나는 전공을 바꿔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했다. 정권이 바뀐 1981년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정치학 박사로서 이승만에 대한 연구 논문과 책을 써오고 있다. 물론 이화장에서의 삶이 '운명'임을 확신하면서.

          ▲ 이화장에서 만난 이인수 박사는 “기념관 내부에는 습도 관리가 안되고
                 벌레가 인다”고 말했다./오종찬 기자ojc1979@chosun.com
―설령 속임을 당했다 해도 그건 대통령의 책임이다. 이미 대통령직을 수행할 능력에 한계가 왔는데도, 왜 장기집권에 집착했을까?

"한일회담만은 당신이 하려고 했던 것 같다(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 협상에서 강경해 미국측의 애를 태웠음). 선거 전에 자유당 당료들에게 '그것 하나는 내가 끝내고 그만두는 게 좋은지'를 물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는 교포인 윌버트 최가 마련해준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집은 어떠했나?

"침실 두개의 작은 목조 주택이었다. 주변에 아는 분들이 생활할 수 있게 중고가구들을 갖다 줬다. 이화장 기념관 안에 첫날 아버님과 함께 식사했던 작은 식탁을 갖고와 전시해 놓았다. 그 집에서 일년쯤 살다가 귀국이 좌절된 뒤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하와이에서 체류할 때는 어머님의 친정에서도 매달 200달러씩 생활비를 부쳐왔다."

―하와이에서 이 대통령의 하루 일상은 어떠했나?

"이미 연로해서 어머님이 짜준 시간표에 맞춰 규칙적으로 지냈다. 한번은 오후에 화초에 물을 주시면서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고국에 들어갈 때 가져가야지' 하셨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곧 들어갈 줄 알았다. 아버님은 '내가 얼마 안 있으면 죽어. 한국 가서 죽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해서, 대국민사과문도 발표했다. 1962년 3월 17일 귀국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때 담당 의사도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왜 귀국이 좌절됐나?

"사과 성명까지 했으니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다. 우린 비행기 표까지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새벽 이화장 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하와이에 전화해 이화장에 불을 지를 거니까 오시지 말라고 해라'고 협박당한 것이다. 그 전화를 받고 얼마 뒤 호놀룰루 총영사가 집으로 와 '귀국 연기를 하라는 지시가 왔다'고 전했다. 아버님의 얼굴이 하얘졌다. '누가 우리나라를 이끌든 간에 정말 나라를 위해 잘해주길 바라오'라는 한마디만 했다. 그때부터 걷지를 못했다. '나도 6·25에서 군생활을 했는데 군사정부가 이럴 수 있나'하는 심정이었다. 결국 나 혼자서 들어왔다."

―다시 하와이로 간 것은?

"1964년 어머니로부터 '아버님이 곧 돌아가실 것 같은데 내 뼈를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미국서 화장을 할 테니 네가 유골을 안고 종친회 선영에 묻어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하와이로 가서 '정부가 아버님을 버렸지 국민이 버린 게 아니다. 국립묘지에 묻히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탄원서를 냈다.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국측의 '메시지'를 받고서 허락이 떨어졌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밤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서거했고, 그해 7월 23일 그 유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장'보다 격이 낮은 '국민장'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유족들이 '가족장'을 택한 걸로 알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서거(逝去)'라고 쓴 신문이 없었다. '운명(殞命)'이라고 썼다. 그게 정부 입장이었다. 정부가 국민장으로 장례절차를 장악해 축소시키려고 했다. 반발 세력을 동원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나라를 만든 건국 대통령으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욕먹을 이유가 없다 싶어 가족장을 고집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만약 국립묘지에 못 들어갈 경우 어떻게 할까' 하고 어머님께 물으니, '그러면 유해를 한강물에 띄운다고 해'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나는 더욱 박정희 정부의 눈밖에 났다."

―현재 국립묘지 내 묘석에는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되어 있다. 당시에는 어떠했나?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1970년까지 아버님 산소에는 묘석이 없었다. 어머님이 '서양에서는 죄인의 묘 말고는 묘석이 없는 산소가 없다. 우리가 죄인이냐'고 억울해했다. 그 얘기가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듬해 '우남 이승만 박사의 묘'라는 묘석이 세워졌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998년 합장(合葬)하면서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 내외분의 묘'라고 새겼더니, 김대중 정권에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내외분의 묘'라는 묘석을 세웠다. 미리 새겨놓은 묘석은 아버님 묘 옆에 묻었다. '건국대통령 묘비'는 땅속에 묻혀 있는 셈이다."

―언제 결혼했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님은 오스트리아의 친정에 가 계셨다. 그러면서 '네가 손자를 보면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1968년 결혼했고, 다음해 아들을 낳자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느 정권에서 가장 힘들었나?

"단국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1972년 어느 날 대학측에서 나를 불러 '그만두라'고 했다. 그래서 이런 정권 아래 살지 않겠다며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아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이화장을 지켰다. 나는 전공을 바꿔 뉴욕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했다. 정권이 바뀐 1981년 돌아왔다."

그 뒤로 그는 정치학 박사로서 이승만에 대한 연구 논문과 책을 써오고 있다. 물론 이화장에서의 삶이 '운명'임을 확신하면서.

             지난 12일 오후 서울 이화동 이화장(梨花莊)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아들 이인수 박사를 만났다. 이 박사에게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로 들
              어가게 된 사연을 들어봤다.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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