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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수출 1호

namsarang 2009. 8. 7. 21:16

[만물상]

한글 수출 1호

  • 오태진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
1919년 23세 미국 청년 윌리엄 타운센드는 중미 마야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과테말라 오지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 칵치켈족과 함께 살며 토속 언어를 익혔지만 문자가 없어 답답했다. 타운센드는 알파벳을 이용해 칵치켈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문자체계를 고안해 교육도 하고 성경도 번역했다. 귀국한 그는 1934년 아칸소 농장에 SIL(여름언어학교)을 세우고 대학생들을 모아 소수언어 문자화 경험을 퍼뜨렸다.

▶현존하는 6900개 언어 가운데 6600개가 문자가 없는 언어이며, 그 중 5800개가 소멸될 위기라고 한다. 무형의 말을 담는 그릇, 문자 없이는 소수 언어가 급속한 세계화 속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SIL인터내셔널은 이제 6000여 자원자가 세계 오지에 나가 알파벳 문자체계를 만들고 보급해 언어를 보존하는 국제단체로 성장했다. 유네스코가 후원하는 '바벨계획'에 따라 지금까지 2550개 언어의 발굴과 연구를 진행했다.

▶무(無)문자 언어 표기수단으로서 알파벳은 단점이 적지 않다. 한 문자가 여러 음가(音價)에 쓰여 혼란스럽고, 풀어쓰기여서 음절 경계가 정확하지 않다. 반면 한글은 글자 수가 적고, 한 글자가 한 음가만 반영해 명쾌하며, 모아쓰기여서 음절이 명확하다. 작가 펄 벅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단순한 글자이며 자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언어와 음성도 표기할 수 있다"고 했다. 한글의 범용성(汎用性)을 일찌감치 꿰뚫어 본 셈이다.

▶한글의 탁월함을 익히 아는 우리 언어·국문 학자들이 해외 무(無)문자 언어에 눈길을 두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현복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는 1994년부터 태국·미얀마 접경지대 소수민족 라후족의 말을 한글로 표기해 가르쳐 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와 이호영 서울대 교수가 각기 중국 소수민족 로바족과 오로첸족에게 한글 보급을 시도했다.

인도네시아 부론섬의 6만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토착어를 표기할 공식 문자로 한글을 도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이미 한글 교과서가 발간돼 지난달부터 시범수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재작년 출범한 문자학 중심 훈민정음학회가 현지에 찾아가 설득한 끝에 얻어낸 결실이다. 한글 수출 1호이자 한글 세계화의 주춧돌이라 할 만하다. 세종이 측은히 여겼던 '어리석은 백성'이 나라 밖에 적지 않다. 이들을 돕는 것도 한글의 사명이다. 다만 현지 정부의 자존심과 국민 정서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