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가르침)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namsarang 2009. 9. 26. 21:33

 

제 3 편 그리스도인의 삶

 

1691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십시오. 이제 그대는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니, 타락한 과거 생활로 돌아가 퇴보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대가 어떤 머리에 속해 있는지, 어떤 몸의 지체인지 명심하십시오. 그대는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빛과 하느님 나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1)

 

1692 신경은 하느님께서 창조 사업으로 인간에게 주신 선물과, 나아가 구속과 성화로써 주신 선물의 위대함을 고백한다. 신앙이 고백하는 것을 성사들이 베풀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다시 나게 한 성사들로써 “하느님의 자녀”(1요한 3,1)가2) 되었고,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2베드 1,4) 되었다. 신앙 안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품위를 깨닫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3) 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분 성령의 선물들을 성사와 기도로써 받는다.

 

1693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늘 성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다.4)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하여 사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해지기”(마태 5,48) 위해 “숨은 일도 보시는”(마태 6,6) 아버지의 눈길 아래에서 살도록 초대된다.

 

1694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5)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분과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며,6) 부활하신 분의 생명에 참여한다.7)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8)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는 사랑의 생활을 할 수 있다.9) 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에 맞추어,10) 그분의 본을 따름으로써 가능하다.11)

 

1695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졌으며”(1고린 6,11), 성도로 부름을 받은12)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성전”(1고린 6,19)이 되었다. 이 “아들의 성령”께서는 성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13) 생명을 주어 살게 하시며,14) 사랑의 실천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15) 성령께서는 죄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시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시며,16) 우리를 비추고 튼튼하게 하시어,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에페 5,9)로 “빛의 자녀”(에페 5,8)답게 살게 하신다.

 

1696 그리스도의 길은 “생명에 이르게”(마태 7,14) 하고, 그 반대의 길은 “멸망에 이르게”(마태 7,13) 한다.17) 복음서에 있는 두 길에 대한 비유는 교회의 교리교육에서 늘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마음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그런데 두 길은 크게 다르다.”18)

 

1697 교리교육에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기쁨과 긴요함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1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로마 6,4)의 교리교육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 성령의 교리교육.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내적인 스승이시고, 그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인도하고, 바로잡아 주며, 굳세게 하시는 다정한 손님이요 벗이시다.

- 은총의 교리교육.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되었으며, 또 은총을 통하여 우리가 하는 일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참행복의 교리교육. 그리스도의 길은 행복 선언 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 길은 사람의 마음이 갈망하는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 죄와 용서의 교리교육.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행동의 조건인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없으며, 또 용서받을 수 없다면 이 진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 인간 덕행의 교리교육. 이러한 교육은 선을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이해하게 한다.

- 그리스도인 덕행의 교리교육. 성인들의 모범에서 고결한 영감을 얻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교리교육이다.

- 십계명에서 밝히는 사랑의 이중 계명의 교리교육.

- 교회의 교리교육.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영적 자산’을 다양하게 주고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이 자라고, 활짝 피어나며, 그 삶을 서로 나눌 수 있다.

 

1698 이러한 교리교육의 첫째이자 마지막 기준은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들 안에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시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분께서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여, 그들의 품위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참다운 ‘머리’이시며, 그대는 그분의 지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는 지체와 머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분의 것은, 정신, 마음, 육체, 영혼, 모든 능력 할 것 없이 다 그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것들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해서 하느님을 섬기고, 찬미하고, 사랑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지체들이 머리에 속해 있는 것처럼 그대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를 섬기고 찬양하기 위해 그대의 모든 것을 당신의 것처럼 쓰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20)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1).

 

 

1. 성 대 레오, 「설교집」, 21, 3: CCL 138, 88(PL 54, 192-193).

2. 요한 1,12 참조.

3. 필립 1,27 참조.

4. 요한 8,29 참조.

5. 로마 6,5 참조.

06. 로마 6,11 참조.

07. 골로 2,12 참조.

08. 요한 15,5 참조.

09. 에페 5,1-2 참조.

10. 필립 2,5 참조.

11. 요한 13,12-16 참조.

12. 1고린 1,2 참조.

13. 갈라 4,6 참조.

14. 갈라 5,25 참조.

15. 갈라 5,22 참조.

16. 에페 4,23 참조.

17. 신명 30,15-20 참조.

18. 「디다케」, 1, 1: SC 248, 140(Funk 1, 2).

1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29항: AAS 71(1979), 1301면 참조.

20. 성 요한 에우데스, 「천주의 성모의 놀라운 성심」, 1, 5: Oeuvres completes, 6권(파리 1908), 113-114면.

 

 

 

제 1 부 인간의 소명: 성령 안의 삶

 

 

1699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은 인간의 소명을 완성한다(제1장). 이러한 삶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유대로 이루어진다(제2장). 이 삶은 곧 무상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말한다(제3장).

 

제 1 장 인간의 존엄성

 

1700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제1절).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의 참행복에 대한 소명 안에서 완성된다(제2절). 인간은 마땅히 이러한 완성을 자유롭게 지향해야 한다(제3절). 인간은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제4절),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양심이 증명하는 선을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제5절). 인간은 자신을 형성하고 내적으로 성장한다. 인간은 육체적 생활과 영적 생활 전체를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제6절). 은총의 도움으로 인간의 덕행은 성장하며(제7절), 죄를 피하고, 만일 죄를 지었을 때에는 돌아온 탕자와 같이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비에 자신을 맡긴다(제8절). 이렇게 해서 인간은 완전한 사랑에 이른다.

 

 

 

제1절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1701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2)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이신3)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구속자이시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 때문에 인간 안에서 일그러진 하느님의 모상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복원되었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귀한 품위를 지니게 되었다.4)

 

1702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하느님의 모습은 성삼위의 일치를 닮은 인간들의 친교 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제2장 참조).

 

1703 불멸의 영혼을5) 받은 인간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6)이다. 임신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영원한 행복을 향하게 되어 있다.

 

1704 인간은 성령의 빛과 권능에 참여한다. 인간은 이성으로 창조주께서 정하신 사물들의 질서를 깨달을 수 있으며, 자기 의지로 참된 선을 향하여 스스로 나아갈 능력이 있다. 인간은 “진리와 선을 탐구하며 사랑하는” 데에서7) 자신의 완성을 찾는다.

 

1705 인간은 그 영혼과 지성과 의지의 능력에 힘입어,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8)인 자유를 받았다.

 

1706 인간은 그 이성으로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피하라.”9)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모든 사람은 양심 안에 울려 퍼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이행하는 이 법을 따를 의무가 있다.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증명한다.

 

1707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였다.”10) 인간은 유혹에 넘어가 악을 저질렀다. 인간은 선에 대한 갈망을 계속 간직하고 있지만 그의 본성은 원죄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악으로 기울게 되었고 쉽게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11)

 

1708 그리스도께서는 수난하심으로써 우리를 사탄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 사는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가 우리 안에서 훼손한 것을 회복한다.

 

1709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능력을 얻어 변화되며, 올바로 행동하고 선을 행할 능력을 지니게 된다. 제자는 자신의 구세주와 일치함으로써 완전한 사랑과 성덕에 이른다. 은총으로 성숙해진 도덕적 삶은 하늘의 영광 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피어난다.

 

간추림

 

1710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12)

 

1711 영혼과 지성과 의지를 지닌 인간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을 향하고, 영원한 행복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진리와 선을 탐구하며 사랑함으로써13) 자신의 완성을 추구한다.

 

1712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14)이다.

 

1713 인간은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피하라.”15)고 촉구하는 도덕률을 따라야 한다. 이 법은 그의 양심 안에 울려 퍼진다.

 

1714 원죄 때문에 본성에 상처를 입은 인간은 자유를 행사하는 데에서 쉽게 잘못을 저지르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171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새 삶을 누린다. 은총으로 자라고 성숙해진 도덕적 삶은 하늘의 영광 안에서 완성된다.

 

 

 

제2절 참행복에 부름 받은 우리의 소명

 

I. 참행복

 

1716 ‘참행복’은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의 핵심이다. 행복 선언은 바로 아브라함 이후 선택된 민족에게 주신 약속을 반복하신 것이다. 이 약속들은 더 이상 지상에서 누리는 기쁨에 그치지 않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완성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3-12).

 

1717 참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묘사하고 그분의 사랑을 표현한다. 참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소명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생활 양식과 태도를 밝혀 준다. 참행복은 고난 가운데에서 희망을 북돋아 주는 역설적인 약속들이다. 참행복은 희미하긴 하지만 이미 제자들이 받은 축복과 약속들을 선포하며, 그것은 동정 마리아와 모든 성인의 삶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II. 행복에 대한 인간의 갈망

 

1718 참행복은 행복에 대한 인간 본성의 갈망에 부응한다. 이 갈망의 근원은 하느님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당신께 이끌기 위해 그 마음 안에 이 갈망을 심어 주셨으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갈망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표현되기 전이라고 해도,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16)

 

주님, 어떻게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당신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을 찾는 것이오니, 제 영혼이 살도록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제 육체는 제 영혼으로 인해 살고 제 영혼은 당신으로 인해 살기 때문입니다.17)

 

하느님께서만 만족을 주실 수 있다.18)

 

1719 참행복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표를 드러내 보인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행복으로 부르신다. 이 소명에 각자가 개별적으로 부름 받고 있지만, ‘약속’을 받고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 전체도 부름 받고 있는 것이다.

 

III. 그리스도인의 행복

 

1720 신약성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행복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19)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20) 하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을 뵙는 것, 주님의 기쁨에 참여함,21)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감22) 등으로 표현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안식하며 볼 것이고, 보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찬미할 것입니다. 마침내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끝이 없을 나라에 다다르는 것 말고 무슨 다른 목적을 가지겠습니까?23)

 

1721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상에 두신 것은 당신을 알고 당신을 섬기고 사랑하여 천국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참행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고”(2베드 1,4)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24) 참행복과 더불어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며25) 삼위께서 누리시는 생명의 기쁨에 들어가게 된다.

 

1722 이러한 행복은 인간의 지성과 능력을 넘어선다. 이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의 기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은총과 같이, 참행복은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불린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 때문에 “하느님을 뵙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부는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자하심과 전능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뵙는 특권을 주기까지 하신다.……“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이다.”26)

 

1723 참행복에 대한 약속으로 우리는 결정적인 도덕적 선택 앞에 서게 된다. 참행복은 우리 마음에 있는 악한 본능을 정화하고, 무엇보다 우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권유한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부나 안락에 있지 않고, 인간적인 영예나 권력에도 있지 않으며, 제아무리 유용해도 과학이나 기술, 예술 등 인간 업적에도 있지 않으며, 어떤 피조물 안에도 있지 않고 오로지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만 있다고 가르친다.

 

오늘날에는 부가 가장 큰 우상입니다. 군중이, 인간 대중 전체가 부를 본능적으로 섬깁니다. 사람들은 재산으로 행복을 재고 또 재산으로 명예를 저울질합니다.……`이 모든 것은 재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오늘날 하나의 우상이며 명성은 또 다른 우상입니다.……`명성, 곧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최상의 선인 양, 그리고 참된 숭배의 대상인 양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여론에 의한 명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27)

 

1724 십계명과 산상설교와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을 말해 준다. 우리는 성령의 은총으로 지탱되는 일상의 행위들로써 한걸음 한걸음 그 길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풍요롭게 되어 교회 안에서 서서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된다.28)

 

간추림

 

1725 참행복은 아브라함 이후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들을 한데 모으며 완성하고, 하늘 나라를 향하게 한다.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넣어 주신 행복에 대한 갈망에 부응한다.

 

1726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최종 목적을 가르쳐 준다. 그 목적은 하늘 나라, 하느님을 뵈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자녀가 됨,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다.

 

1727 영원한 생명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은총과 마찬가지로 참행복도 초자연적인 것이다.

 

1728 참행복은 우리를 지상의 행복에 대한 결정적인 선택 앞에 서게 한다. 참행복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

 

1729 천상 행복은 이 세상 재물을 하느님의 법에 맞게 쓰는 식별의 기준을 결정한다.

 

 

 

제3절 인간의 자유

 

1730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시어 인간에게 자발성과 자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위를 다스릴 수 있는 인격의 존엄성을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맡겨 두고자’(집회 15,14) 하셨다. 그것은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그분을 따르며 자유로이 충만하고 복된 완전성에 이르도록 바라신 것이다.”29)

 

인간은 이성을 지녔으며, 이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합니다. 그는 자유롭고 자신의 행위를 자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30)

 

I. 자유와 책임

 

1731 자유는 이성과 의지에 바탕을 둔,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며, 이것을 하거나 또는 저것을 하는 능력이고, 이처럼 스스로 숙고해서 행동하는 능력이다. 각 사람은 자유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루어 나간다. 인간은 진리와 선 안에서 자유를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한다. 자유는 우리의 행복이신 하느님을 향할 때 완전하게 된다.

 

1732 자유는 그 최종 선이신 하느님께 결정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선과 악 사이의 선택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완덕을 향해 성장할 수도 있고 퇴보하여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자유는 인간 행위의 고유한 특징이다. 자유는 칭찬이나 비난, 공로나 허물의 근거가 된다.

 

1733 선을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자유로워진다. 선과 정의를 위해 봉사할 때에만 참 자유를 얻는다. 불순명과 악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 남용이며 “죄의 종”이31) 되게 한다.

 

1734 자유는 인간이 행위의 자발성에 따라 자기 행동에 대하여 책임지도록 한다. 덕의 진보와 선에 대한 인식과 금욕적 삶의 진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지의 통제력을 성장시킨다.

 

1735 어떤 행동에 대한 인책성(引責性)과 책임은 무지, 부주의, 폭력, 공포, 습관, 무절제한 감정과 그 외에 정신적 사회적인 요인들 때문에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

 

1736 직접 원해서 행한 모든 행위는 그 행위자에게 책임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주님께서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창세 3,13) 하고 물으시며, 카인에게도 그렇게 물으신다.32) 그리고 예언자 나단도, 우리야의 아내와 간통하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에게 그렇게 묻는다.33)

 

사람들이 알았거나 했어야 할 것을 소홀히 한 결과로 저질러진 행위는 간접적인 고의에 따른 행위일 수 있다. 교통 법규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 교통 사고가 그러한 예이다.

 

1737 어떠한 결과가 행위자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일어났을 경우에는 용인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든 자식을 간호하다가 그 어머니가 죽을 지경이 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다가 죽게 되는 경우처럼, 나쁜 결과가 행위의 목적으로든 수단으로든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면 술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던 사람이 저지르게 되는 살인처럼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행위자가 그 결과를 피할 수 있는 경우라야 한다.

 

1738 자유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행사된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타고난 권리를 지니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러한 권리를 존중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자유를 행사할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분리될 수 없으며 도덕적,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러하다.34) 국가는 공동선과 공공 질서의 범위 안에서 이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해야 한다.35)

 

II. 구원 경륜 안에서 본 인간의 자유

 

1739 자유와 죄. 인간의 자유는 유한하며, 잘못될 수 있다. 실제로 인간은 잘못을 저질렀다. 자유로이 죄를 지은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을 거부하여 스스로 자기를 배신하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 최초의 소외는 다른 많은 소외를 초래하였다. 시초부터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오용한 결과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난 불행과 억압을 증언하고 있다.

 

1740 자유에 대한 위협. 자유의 행사는 무엇이든 말하고 행할 권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주체인 인간은 지상의 재화를 즐길 때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목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36)는 주장은 잘못이다. 한편 자유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데에 필요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분야의 조건들이 너무도 자주 무시되고 침해되고 있다. 이러한 맹목적이고 불의한 상황들은 도덕적 삶을 짓누르며, 사랑을 어기고 죄를 짓도록 강자와 약자를 모두 유혹한다. 인간은 윤리적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자유를 손상시키고, 자신을 속박하며, 이웃에 대한 우애를 파괴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거역하게 된다.

 

1741 자유와 구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그분은 인류를 노예로 만든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갈라 5,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와37) 일치한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2고린 3,17).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38) 누린다.

 

1742 자유와 은총. 우리의 자유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넣어 주신 진리와 선을 분별하는 능력과 맞을 때,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의 자유와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으로는 특히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은총의 작용에 온순히 따르면 따를수록, 시련 가운데 또 외적 억압과 속박 앞에서 우리의 내적 자유와 확신은 더욱 증가함을 알 수 있다. 은총의 작용으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자유를 가르쳐 주시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당신 사업의 자유로운 협력자가 되게 하신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해로운 모든 것을 멀리 물리쳐 주시어

저희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하시고

자유로이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39)

 

간추림

 

1743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사에 맡겨 두시기를”(집회 15,14) 원하셨고, 창조주를 자유로이 따름으로써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신다.40)

 

1744 자유는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능력이며, 따라서 스스로 의도하여 행동하는 능력이다. 자유는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향할 때 그 행위의 완전함에 이른다.

 

1745 자유는 인간 행위의 고유한 특징이다. 자유는 인간에게 자신이 행하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운다. 숙고한 후의 행위는 그 자신의 것이다.

 

1746 무지, 폭력, 공포나 그 밖의 정신적 또는 사회적 요인들은 어떤 행위에 대한 인책성이나 책임을 줄이거나 없앨 수도 있다.

 

1747 자유를 행사할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도덕적,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의 행사에는 무엇이든지 행하고 말할 거짓 권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174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갈라 5,1).

 

 

 

제4절 인간 행위의 도덕성

 

1749 인간은 자유로써 도덕적 주체가 된다. 인간이 의도적인 행동을 할 때, 그는 이를테면 그 행위의 주인이 된다. 인간의 행위, 곧 의식의 판단에 근거하여 자유로이 행한 행위들은 도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것들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다.

 

I. 도덕성의 근원

 

1750 인간 행위의 도덕성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달려 있다.

 

- 선택된 대상.

- 의도하는 목적이나 의향.

- 행위의 정황.

 

대상과 의향과 정황은 인간 행위의 도덕성의 ‘근원’, 곧 구성 요소가 된다.

 

1751 선택된 대상이란 의지가 의도적으로 지향하는 선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 행위의 질료이다. 선택된 대상은 이성이 인지하고 그것이 참된 선에 부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함에 따라서 이루어진 의지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정한다.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들은 양심에 따라 입증된 선악의 합리적 질서를 일러 준다.

 

1752 의향은 대상과는 대조적으로 행위의 주체 편에 자리잡고 있다. 의향은 행위의 자발적 근원과 가까운 것이면서, 목적을 통해 그 행위를 결정짓기 때문에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목적은 의향의 첫 번째 귀결점이며 행위가 추구하는 목표를 가리킨다. 의향은 목적을 향한 의지의 움직임이며, 행위의 귀결점과 관련된다. 의향은 의도된 행동이 기대하는 선을 지향한다. 의향은 우리의 개별 행위들의 방향을 잡아 주는 데 머물지 않고, 여러 행위들을 동일한 목적으로 향하게 할 수 있고, 또 삶 전체를 궁극적 목적으로 향하게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봉사는 이웃을 돕는 것이 목적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고무될 수 있다. 상대방의 호의를 얻거나 또는 자랑하기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경우처럼, 동일한 행동도 여러 가지 의향을 지닐 수 있다.

 

1753 선한 의향(예를 들어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질서한 행동(거짓말이나 비방)을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국민을 구하는 합법적 수단으로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반대로, 그 자체로는 선한 행위일 수 있지만(자선 행위와 같은 것)41) 나쁜 의향(예컨대 허영)이 개입할 경우에 그런 행위는 악한 행위가 된다.

 

1754 결과들이 포함되어 있는 정황은 윤리적 행위의 부차적 요인이다. 정황은 인간 행위의 윤리적 선악을 가감시킨다(예를 들어 도둑질한 돈의 액수). 또 정황은 행위자의 책임도 가감시킨다(죽음의 공포 때문에 저지른 행위 등). 정황 자체가 행위의 도덕적 특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정황은 악한 행위 자체를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할 수 없다.

 

II. 선행과 악행

 

1755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가 되려면 대상과 목적과 정황이 모두 선해야 한다. 악한 목적은 행위의 대상 자체는 선하더라도(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나 단식) 그 행위를 타락시킨다.

선택의 대상은 그 자체로도 행위 전체를 그릇되게 만들 수 있다. 어떤 구체적 행위들 ─ 간음과 같은 행위 ─ 의 선택은 언제나 잘못이다. 그 선택에는 의지의 무질서, 곧 윤리적 악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1756 그러므로 행위를 일으키는 의향이나 그 행위의 테두리를 이루는 정황(환경, 사회적 압력, 행동에 대한 강제나 필요성 등)만을 고려하여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황이나 의향과는 관계 없이 그 대상 때문에 그 자체가 심각한 잘못이 되는 행위들이 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과 거짓 맹세, 살인과 간통 등이 그러하다. 선한 결과를 얻으려고 악을 행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간추림

 

1757 대상과 의향과 정황은 인간 행위의 도덕성의 세 가지 ‘근원’이다.

 

1758 선택된 대상은 이성이 그 대상의 선악을 분별하여 판단함에 따라 의지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규정한다.

 

1759 “선한 의향으로 행한 악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42)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1760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가 되려면 대상과 목적과 정황이 모두 선해야 한다.

 

1761 어떤 행위들은 그 선택에 무질서한 의지, 곧 윤리적 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이다. 선한 결과를 얻으려고 악을 행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제5절 감정의 도덕성

 

1762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써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passio)이나 느낌은 행복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고, 그를 위해 도움이 되기도 한다.

 

I. 감 정

 

1763 ‘감정’(感情)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의 유산에 속한다. 느낌이나 감정은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느끼고 상상한 것을 행하거나 행하지 않게 하는, 한쪽으로 기우는 정서나 감수성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1764 감정은 인간 심리의 자연적인 요소로서, 감성적 생활과 정신적 생활을 영위하는 장(場)을 마련해 주며, 그 둘 사이의 통로를 보장해 준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감정이 솟아나는 원천이라고 일컬으신다.43)

 

1765 감정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선에 대한 이끌림에서 일어나는 사랑이다.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 대한 갈망과, 그 선을 달성하려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이 움직임은 얻은 선에 대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족된다. 악에 대한 두려움은 장차 도래할 악에 대한 증오와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 움직임은 현존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나 거기에 대항하는 분노로 결말이 난다.

 

1766 “사랑은 누군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다.”44) 다른 모든 애정의 근원은 선을 향한 인간 마음의 원초적인 움직임이다. 사랑해야 할 것은 오직 선뿐이다.45) “사랑이 악하면 감정이 악하고, 사랑이 선하면 감정이 선하다.”46)

 

II. 감정과 도덕적 삶

 

1767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감정은 실제로 이성과 의지로 일어나는 한에서만 도덕적 평가를 받는다. 감정은 “의지의 자극을 받기 때문에, 또는 의지가 막지 않기 때문에”47) 의지적인 것이라고 불린다. 이성으로 감정이 조절되는 것은 도덕적 또는 인간적 선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48)

 

1768 고상한 감정들이 인간의 도덕성이나 성덕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도덕적 삶이 표현되는 표상과 감정의 고갈되지 않는 창고와 같다. 감정이 선한 행동에 이바지할 때에는 도덕적으로 선하며, 그 반대 경우에는 악하다. 올바른 의지는 감각적 움직임들을 받아들여 선과 행복을 향하게 하지만, 악한 의지는 무질서한 감정에 굴복하며 이를 격화시킨다. 감성과 감정들은 덕행 안에 받아들여지거나 악습으로 바뀔 수 있다.

 

1769 주님의 지극한 고뇌와 수난에서 드러나듯이, 성령께서는 몸소 인간의 고통과 두려움, 슬픔을 포함한 인간 전체를 움직이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당신의 일을 완수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감정은 하느님의 자비와 행복을 통해 완숙해질 수 있다.

 

1770 인간은 자신의 의지뿐만 아니라, 시편 말씀처럼, 자신의 감각적 요구로도 선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도덕의 완성을 이룬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시편 83,3[84,2]).

 

간추림

 

1771 ‘감정’이라는 말은 열정이나 감성을 가리킨다. 인간은 자신의 정서를 통해서 선을 예감하고 악을 예측한다.

 

1772 주요한 감정들은 사랑과 증오, 욕망과 두려움, 기쁨, 슬픔, 분노이다.

 

1773 감각적 충동으로서 감정은 도덕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감정이 이성과 의지로 일어날 때, 그 안에 선이나 악이 존재하게 된다.

 

1774 정서와 감정들은 덕행 안에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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