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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일자리 보고서

namsarang 2009. 11. 23. 22:06

[마이너리티 일자리 보고서]

따돌림 →학업포기 →구직난 →가난 '악순환'

  • 입력 : 2009.11.23 04:13 / 수정 : 2009.11.23 08:32

식당·유흥업소 종업원… 제대로된 일자리 못구해
"진짜 복지는 직업 제공"

지난 9일 경기도 부천의 한 아파트. 지적(知的) 장애인 3급인 김지은(24)씨는 어머니 이명숙(53)씨의 양손을 양 무릎에 올려놓고 화장품 상자에서 매니큐어와 물감을 꺼내 들었다.

"엄마! 움직이면 안 돼!"

발음은 또렷했지만 영락없는 초등학생 말투다. 김씨는 어머니 손톱에 정성스레 매니큐어를 칠하기 시작했다. 면봉으로 손톱 주변 얼룩을 닦아낸 뒤 이쑤시개로 물감을 찍어 무늬를 그려넣고 큐빅(장식품)도 붙여 나갔다. 30분 만에 어머니의 오른손 손톱에는 아기자기한 꽃무늬 장식이 새겨졌다.

김씨는 네일아트(손톱·발톱에 장식을 그려넣는 패션 미용) 미용사가 되고 싶어한다. 학원에서 '더 배울 게 없다'고 할 정도의 실력도 갖췄다. 하지만 취업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미용사로 일하는 데 필요한 자격증을 따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격증은 '필수'는 아니지만 미용업체들은 직원 고용 때 자격증으로 실력을 판별한다. 김씨는 지난 1년간 몇번이나 자격증 시험에 도전했지만 필기시험에서 떨어졌다. 지적 장애 탓에 전문적인 시험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지은(오른쪽)씨는 어머니 말고 다른 사람들의 손톱도 예쁘게 꾸며 주고 싶다. 하지만 지적 장애 탓에 그녀는 네일아트 미용사가 되 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학원도 실력을 인정하는 그녀에게 필기시험 자격증이 꼭 필요한 것일까./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그녀는 3살 때 독감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주사 쇼크로 장애를 얻었다. 고교까지 졸업했지만 지능은 여전히 초등학생 수준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다.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 상품안내·주차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지만 본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어머니가 발벗고 나서 지인을 통해 주선해준 덕분이었다.

"직업도 구하지 못하는데…. 나중에 내가 없으면 딸 혼자서 어떻게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지 걱정이에요." 어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비정규직 마이너리티

우리 사회 마이너리티(소수자)들이 빈곤계층화(化)하는 것은 결국 일자리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최정은(42) YWCA 사회개발위원회 팀장은 "마이너리티들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결국 빈곤층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그룹이 지적 장애인이다. 김종인 나사렛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자리 문제에 있어서 지적 장애인은 장애인 중의 장애인"이라고 했다. 2008년 현재 국내 지적장애인은 15만 9853명(자폐성 장애까지 포함) 이 중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6% 수준에 불과하다.

주한미군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도 한국의 '순혈주의'로 인해 삶이 붕괴되고 있다고 김통원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말했다. 혼혈인들은 학창 시절부터 주변 놀림을 받으며 자라고 그 결과 학교에서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잦다. 직업을 가질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에 내몰리는 혼혈인이 많다는 얘기다.

흑인계 혼혈인 김선주(가명·34)씨는 의정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른 지 17년째지만, 원래 꿈은 밤무대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국가대표를 꿈꾸던 육상 유망주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거리 선수로 활약하며 1등을 독차지했지만 정작 전국대회에는 출전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육상부 동기) 어머니들이 '왜 흑인과 우리 아이를 같이 훈련시키냐'며 항의했어요. 동기들은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저를 팀에서 빼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고교 중퇴 후 밤무대를 전전하며 한 달에 25만원을 받고 노래를 불렀다. 파출부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던 어머니(70)가 병에 걸린 터라 돈이 급했다. 지금 받는 월급은 200만원. 월 100만원씩 빚을 갚고, 어머니 병원비(40만원)와 월세(19만원) 등을 내고 나면 간신히 먹고 살 수준이다.

일자리가 진짜 복지

전문가들은 마이너리티들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복지'라고 말한다. 직업이 있어야 정기적인 소득이 생기고, 장기적인 인생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인 교수는 "선진국의 경우 소수자들을 단순한 시혜적 대상이 아닌 일자리를 제공하고 세금을 낼 수 있는 국민으로 만드는 정책을 펴고 있다"며 "진정한 복지는 소수자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이주 노동자, 다문화 여성, 탈북자, 장애인 등의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저출산 시대 국가적인 인력 낭비"라며 "정부 차원에서 취업지원 정책을 마련해 이들을 취업시장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왕따가 먼저일까? 사회성 부족이 먼저일까?
네일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김지은씨는 지적장애 때문에 자격증 취득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프로 못지 않다. /이태경 기자ecaro@chosun.com

 

  곱슬머리라고 방송제한… 가슴에 칼 품고 오기로 버텨

입력 : 2009.11.23 04:13

인순이(52).

"지은 죄 없는데… 참는 법부터 배워"
스포츠·연예계 이외 진출 드물어
성공한 혼혈인들의 고백 "너무 힘들다"

가수 인순이(52·본명 김인순)·박일준(55), 농구감독 김동광(58)…. 혼혈인으로 성공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어렸을 때 '너는 파주제(製)냐, 동두천제냐'(파주에서 근무한 미군의 딸이냐, 동두천에서 근무한 미군의 딸이냐는 뜻)는 질문을 받곤 했어요."(인순이씨)

인순이씨는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의 경계만 넘어가면 모든 것이 벽처럼 다가왔다고 한다. 손가락질받는 것을 참는 법부터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곱슬머리 때문에 방송 출연에 지장을 받았고, 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출전할 수 없었다.

인순이씨는 "주변에서 던지는 '넌 안 돼'라는 말이 나를 좌절시키기보다는 오기를 갖게 했다"며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가수 박일준(왼쪽), 농구 선수 출신 김동광(오른쪽).

가수 박일준씨는 "혼혈이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아픔인 6·25전쟁이 있었기에 생겨났다"며 "남들과 똑같이 한국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왜 죄를 지은 것처럼 차별과 편견의 굴레 속에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씨는 "어린 시절 차별받고 놀림받았던 기억을 아들에게 대물림해주기 싫어 미국으로 보내 교육시켰다"며 "따돌림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제대로 된 일자리 없이 방황하는 젊은 혼혈인들이 많다"고 했다.

삼성 프로농구단의 감독을 지냈던 김동광(KBL 경기이사)씨는 "가수나 운동선수로 성공한 이들은 말 그대로 행운아"라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말했다. 김씨는 "혼혈인은 대학 진학이나 취업 때부터 벽에 부딪힌다"며 "나도 은행(실업농구단)에 들어갈 때 임원들이 '나중에 어떻게 고객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싶어 채용을 망설였다더라"고 했다. 김 감독은 "나는 백인계지만 흑인계 혼혈인들은 차별로 인한 고통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주로 스포츠·연예 분야에 한정돼 있다는 점은 혼혈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내 월급은 10분의 1이었다

  • 입력 : 2009.11.23 02:43

절반의 한국인, 절망의 혼혈인
용접하다 20m 추락한 순간'이렇게 죽는구나'가 아닌'어떻게 먹고사나' 걱정이…
저임금은 오히려 참을만해… 색안경 낀 시선이 더 고통
미군 주둔 독일에서는 美와 교육·양육비 50%씩

혼혈인, 탈북자, 시각장애인, 다문화 여성, 이주노동자….마이너리티(소수자·少數者)들이 대개 가난한 것은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구직(求職) 전선의 차별과 편견 앞에 또 한 번 좌절하고, 구조적인 ‘빈곤의 함정’에 빠져든다. 대한민국 주류(主流) 사회가 방치한 이들의 직업 현장을 추적해보았다.

- 편집자


이명호씨는 지금 오토바이 택배원으로 고단한 생계를 잇고 있다. 이씨가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일거리 문자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하고 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1998년 3월. 당시 44세이던 이명호(55)씨는 경기도 수원의 교량 공사 현장에서 와이어 하나에 매달린 채 20m 높이에서 철골 용접을 하다 발을 헛디뎌 추락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어깨가 탈골되고 팔이 부러지는 전치 10주의 중상을 입었다. 그는 "떨어지는 순간 '죽는구나'하는 생각보다 '이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부터 들더라"고 했다. 그는 이른바 '3D(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용접' 기술자였다. 3D 용접은 20~30m 높이의 고공(高空)용접이나, 맨홀·하수관 용접, 수중(水中)용접 등을 말한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거나, 작업 환경이 열악해 다들 기피하는 작업이다. 이씨는 "살아남으려 이를 악물고 기술을 배웠고, 남들이 기피하는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6·25전쟁 참전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씨의 학력은 고교 중퇴가 전부다. 고3 때 '깜둥이' '튀기'라고 놀리며 오물을 던진 동네 청년들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됐고 퇴학당했다. 한 달 만에 구치소를 나왔지만 평소 술만 마시면 그를 두들겨 패던 한국인 새 아버지는 그를 집에서 내쫓았다. 이씨는 18세 때 서울 양평동의 한 플라스틱 제조공장에 취업했다. 첫 달 월급은 3500원. 당시 공장 노동자 평균 월급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그는 "저(低)임금은 차라리 참을 만했다"며 "주변의 색안경 낀 시선이 더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공장 관리자는 그에게 남들보다 많은 물량 처리를 요구했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욕을 해댔다. 동료 직원들은 피부색이 다른 그를 따돌렸다. 하루 15시간 이상 일하고도 월급이 체납되기도 했다. 결국 1년 반 만에 공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혼혈인은 남들만큼 일해선 안되겠구나, 악착같이 기술을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혼혈인을 지원하는 한미재단으로부터 학원비를 지원받아 용접기사 자격증과 운전면허증을 땄다. 그리고 5000~1만원의 헐값 일당을 마다하지 않고 전국 공사판을 누비며 용접실력을 길렀다. 5년 후 그는 몇몇 중견 건설회사와 하청업체에 입사원서를 넣었다. 번듯한 용접 자격증도 땄고 ‘실전’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서류심사 통과도 힘겨웠다고 했다. 면접에 가면 자동탈락이었다. 그를 본 면접관들의 첫마디는 “어떤 자격증 있어요? 어떤 경력이 있어요?”가 아니라 “영어 잘해요? 외국인 같은데…”였다.

그는 조그만 하청업체 간판을 내걸고 인부들을 모은 뒤 ‘3D’ 용접을 도맡았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고공 용접도, 지린내가 진동하는 맨홀·하수관 용접도 마다하지 않았다. 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건너가 3년6개월 동안 건설 공사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하청 물량이 뚝 끊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용했던 인부 2명이 작업 중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 보상비를 갚느라 모아둔 돈도 대부분 날렸다.

이후 그는 방송 프로그램의 외국인 역할 엑스트라 등으로 입에 풀칠하다 2001년부터 오토바이를 1대 구입해 퀵서비스 일을 시작했다.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일해 하루 10만원쯤 번다.

“지금도 물건을 받으러 가면 ‘외국인이 서울 지리를 잘 알아요?’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요. 한국에서 태어나 55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니 서럽죠.”

이씨처럼 미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나 국내에 거주하는 혼혈인 수는 1500~2000명 정도로 추산될 뿐 공식적인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모의 차이가 확연한 혼혈인은 노동시장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겪고 있다”며 “따돌림→학업포기→구직난→비정규직→가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묶여 있다”고 말했다.

2006년 여성부 조사에 따르면 주한미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중 정규직 종사자는 24%에 불과하다. 지난 3월 보건복지가족부성균관대가 실시한 혼혈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자리를 가진 혼혈인의 80%가 월소득 150만원 미만을 받고 있었다. 혼혈인에 대한 정부나 사회 차원의 취업 정책은 전무하다.

반면 미군이 주둔했던 독일·일본 등에서는 정부와 민간영역에서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독일의 경우 주둔 미군의 자녀들은 18세가 될 때까지 미국과 독일 정부가 양육비와 교육비를 50%씩 분담해 안정적으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일본은 1998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오키나와 지역에 혼혈인 교육만을 전담하는 학교가 만들어진 이후 다양한 교육 지원책이 실시되고 있다. 혼혈인 모임인 국제가족총연합 배기철 회장은 “비참하게 사는 혼혈인들의 실태부터 정확히 파악한 뒤, SOFA(한·미 주둔군 지위협정) 개정 등을 통해 한국과 미국 정부가 공동으로 혼혈인에 대한 양육비·교육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급증하는 동남아 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태어난 혼혈인 자녀(10만3000명)들도 앞으로 10년 뒤부턴 구직 시장에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다. 설동훈 교수는 “이들도 미군 혼혈자녀처럼 방치될 경우 차별과 빈곤이 이어지는 악순환의 함정에 빠져 엄청난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마이너리티(minority)

신체적 또는 문화적 특성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구분되고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사람들(미국 사회학자 루이스 워스). 사회학에선 ①신체 또는 문화적으로 뚜렷한 차이가 있고 ②정치·경제·사회적 권력이 열세인 데다 ③사회적 차별을 받으며 ④차별받는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이들을 마이너리티로 지칭한다.

10대(代)·60대(代)에게도 통하는 이름, 인순이

입력 : 2009.11.06 03:23 / 수정 : 2009.11.06 08:45

최근 발표한 노래 '아버지' 인기몰이…
'거위의 꿈' 이후 최고의 히트
60代가 보는 '가요무대'서… 10代의 '뮤직뱅크'까지 출연
평생 아버지는 한번도 못봐… 내년 2월엔 카네기홀 공연

11년 만에 다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가수 인순이는“교민들과 미국인들 에게 우리 대중음악의 힘을 보여주고 오겠다”고 다짐했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평생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여가수가 부르는 '아버지'가 사람들 마음을 흔들고 있다. 주한 미군이었던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가수 인순이(52) 목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열네살 때까지 간혹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직접 느껴본 시간은 전혀 없었다"는 그이지만 무대에서는 "한 걸음도 다가설 수 없었던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서로 사랑을 하고 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며 거꾸로 용서를 빈다. 그리고 이 절실한 노래는 청중들 누구나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촉촉하게 되살려낸다. '거위의 꿈' 이후 인순이 최고의 히트곡이자 요즘 중·장년층이 가장 즐겨 듣는 노래다.

"사실 전 아버지의 자상함이나 엄격함 같은 걸 모르죠.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주변 사람들을 통해 간접 경험한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아버지들을 떠올리며 노래할 때도 많아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려 무뚝뚝해 보일 때도 많지만 '사랑합니다'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아버지들이죠."

인순이는 이 노래로 활동하면서 온갖 가요 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가요무대'에서는 고령의 원로 가수들과, '뮤직뱅크'에서는 10대 아이돌 스타들과 교유하며 가뿐히 세대를 뛰어넘는다. "몸살이 심해서 그저께는 리허설 마치고 링거를 맞은 뒤, 다시 라이브를 했다"며 머플러를 단단히 동여맨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무대를 가리는 사치를 부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거대한 무대가 다가왔다. 미국의 유명 공연장인 뉴욕 카네기홀 주공연장인 아이작 스턴홀에서 내년 2월 5일 콘서트가 잡혔다. 주로 실력을 인정받는 클래식 뮤지션들이 서는 무대다. 인순이로서는 99년 첫 공연 이후 11년 만의 기회.

"유쾌한 심정이에요. 첫 공연 할 때는 엄청 부담스러웠죠. 신경성 장염, 위염 때문에 한 달쯤 밥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단 한 번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가 어머니의 힘만으로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잔뜩 흥분했었던 거죠. 달나라에 태극기 꽂고 오는 듯한 거창한 감회가 밀려들었어요."

그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 대관 심사에 잇따라 탈락한 뒤, 지난해 기자회견을 열고 전문 공연장이 대중가수를 외면한다며 비판,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는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 못 서니까 다시 카네기홀을 뚫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까 두렵다"며 "어쨌든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하는 건, 아직도 제 꿈"이라고 했다. "쉽게 이뤄지면 그건 꿈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한국 내 혼혈인의 희망적 상징으로 통하는 인순이는 피부색으로 인해 겪었던 힘겨운 세월에 넌더리를 내며 15년 전, 미국에서 딸을 낳았다. "혹시 아이가 저를 많이 닮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던 거죠. 그래서 미국 시민권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이민 갈 마음은 전혀 없었고요. 원정출산이라고 볼 수도 있죠. 아이를 낳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라디오에서 이런 사연을 전부 공개했어요. 청취자들에게 '마음껏 욕해 달라'고 했었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었으면 꽤 논란이 커졌을 텐데…."

하지만 인순이는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급속도로 다문화 가정에 대해 마음을 열고 있어 안심이 된다"고 했다. 자신의 세월을 극복한 그의 관심은 요즘 오히려 아버지의 세월에 쏠려 있다. "어떻게 보면 본인과 상관없는 나라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 아니냐?"며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와 동료들을 인정해줘야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그는 최근 공군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군인의 딸' 자격으로. 이날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수백명 군인들이 뒤집어졌다. "외국에 파병 나가도 책임지지 못할 씨는 뿌리고 오지 마세요." 인순이는 "저니까 할 수 있는 얘기"라며 입을 앙다물고 눈으로 웃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 두번째 공연하는 가수 인순이를 인터뷰하였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2) '탈북자'라는 이름의 취업 족쇄

 

"기술 자격증 5개 따도 소용 없어 北출신 숨기려 이력서·말투 고쳐"

  • 김경화 기자

발행일 : 2009.11.24 / 종합 A1 면

 
1998년 압록강을 넘어 탈북한 김기철(가명·59·서울 가양동)씨는 5개 자격증을 갖고 있다. 보일러취급기능사·공조냉동기계기능사·방화관리자2급·사용시설안전관리자·전기기능사….하지만 현재 실업 상태다. 실업수당(70만원)에다, 조선족인 아내가 '희망근로'로 벌어오는 돈을 보태 근근이 살고 있다.

보통 김씨가 가진 자격증 중 한두 가지만 있어도 빌딩이나 아파트 관리직 취업은 너끈하다. 하지만 김씨에게 화려한 '5종 자격증'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탈북자라는 신분을 감추었더니, 그렇게도 안 되던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김씨는 지난 8월까지 서울의 한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서 보일러 설비담당으로 일했다. 이력서를 살짝 손본 덕이었다. 김씨가 찾은 취업정보회사는 "이력서에 탈북자라고 써놓으면 누가 채용하겠느냐. 경력·출생지와 북한 군(軍) 경력을 지우라"고 권유했다.

면접에서 '적당히 둘러대는 방법'도 배웠다. "이전에 뭐했느냐"고 물으면 "자영업 하다 망했다"고, "학교는 어디 나왔느냐"고 물으면 생각나는 대로 "○○공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어렵사리 취업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1년 만에 쫓겨났다. 김씨는 "나중에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 식당 종업원이며, 일용직 건설 노동자, 택배기사 등으로 전전했다. 그가 지나치달 정도로 자격증에 매달리게 된 것은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제대로 살려면 '기술'과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죠." 김씨의 말투는 투박했지만, 이북 억양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 역시 취업을 하기 위해 연습해가며 필사적으로 익힌 '서울말'이었다.

그가 지원했던 서울 N호텔은 "우리는 서비스직이어서 탈북자는 못 쓴다"고 했다. 지하에서 기계 설비만 다루는 일인데,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고 김씨는 생각한다. 서너 곳의 호텔과 10여 곳의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죄다 떨어졌다.

작년엔 남한 친구와 함께 서울 시내 한 경찰서의 기계실 근무자를 뽑는데 지원했다. 김씨는 떨어졌고, 자격증이 더 적은 남한 친구는 뽑혔다.

통일부는 9월 말 현재 탈북자 수를 1만7171명으로 추산한다. 매년 3000명씩 늘어나는 추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정착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조사(2008년 12월)에 따르면,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탈북자는 49.6%에 불과했다.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탈북자들을 조사했더니 57.6%가 취업보다 기초생계급여·의료보호 혜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국감 자료).

탈북자 쪽의 문제도 있다. 구직 의지가 약한 것이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 안효덕 대외협력부장은 "탈북자들은 국가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눠주는 사회주의 습관에 젖어, 자본주의의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탈북자 중엔 월 60만원 내외의 기초생활수급자 지원에 안주해 소득이 드러나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다. 탈북자는 하나원에서 나올 때 600만원을 받고, 그 후 취업 기간에 따라 1년 근속을 하면 450만원, 2년 근속은 500만원, 3년 근속은 550만원의 인센티브를 주지만, 이를 챙겨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방현종 복지사는 전했다.

탈북자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통일부는 탈북자를 고용하는 사업주에게 임금의 절반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주는 탈북자가 다른 직원들과 정서가 맞지 않고, 고용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탈북자 고용에 소극적"이라고 북한민주화위원회 도명학 통일교육부장은 말했다. 안효덕 부장은 "탈북자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 이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편입되지 못하면 결국 사회 불만그룹으로 조직화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들을 시혜(施惠)대상이 아니라 '직업인'으로 자리 잡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자리 구할 수 없으면 우리가 만든다"

입력 : 2009.11.24 02:27

탈북자 자활 일터 '행복나눔식당'

20일 늦은 오후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 위치한 '행복나눔식당'. 가게 마당에 놓인 평상에선 40대 남자 2명이 콩대를 벗겨낸 콩을 말리고 있고, 한편에는 박수정(43·경기도 포천)씨가 호박죽을 쑤기 위해 늙은 호박을 손질하고 있었다.

"저 남은 고구마는 어떡합네까? 저번에 받은 홍어도 잘 삭았습네다."

박씨가 북한 사투리가 묻어나는 말투로 한창권(48) 대표에게 물었다. 이곳은 탈북인단체총연합(대표 한창권)이 운영하는 탈북자 자활 일터다. 1994년 한국에 들어온 한 대표는 1998년 최초의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인협회'를 만들어 탈북자 인권 운동을 하다, 지난해 28개 탈북자 단체를 통합해 총연합을 만들었다.

한 대표는 "탈북자들이 '한국인'으로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란 생각에 행복나눔식당을 열었다"고 말했다. 탈북자 10명(남 5명·여 5명)이 이곳에서 반찬 도시락을 만들어 2000원에 교회·학교 등에 납품하고,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행복나눔식당 직원들은 “우리는 (탈북할 때) 고생을 너무 많이 해 일찍 늙었다”며 카메라 앞에 서길 쑥스러워했다. 하지만 “우리 식당에 놀러오세요”라는 한창권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의 말에 이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직원들은 대부분 한국에 들어온 지 5년 미만으로, 저마다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 '동병상련의 탈북자들이 모인다'는 소식에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박수정씨는 이전에는 1년 정도 가죽 공장에서 일했지만, 퇴행성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파서 오래 다니지 못했다.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차량 실내전조등을 조립해 납품하다가 지난 7월 행복나눔식당에 합류했다. 박씨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의지가 된다"고 말했다.

식당 터는 원래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했던 김순애(53) 사장이 후원했다. 가락시장에서 20년간 일한 김 사장이 인맥을 이용해 시장에서 팔고 남은 채소와 생선 등을 공수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한 대표는 행복나눔식당이 '1석4조'의 사업이라고 했다. 일자리를 창출하면서도 쓰레기 처리 비용을 아낄 수 있고, 불우이웃을 돕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면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다른 탈북자들도 행복나눔식당을 본보기 삼아 스스로 자활 일터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매나눔재단이 만든 사회적 기업인 '메자닌 아이팩'(박스 제조 공장), '메자닌 에코원'(블라인드 제조 회사) 등도 탈북자 자활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탈북자 30여명이 근무하는 메자닌 아이팩은 지난 3월 창업 10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고, 지난 1월 문을 연 메자닌 에코원도 올해 안에 흑자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