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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 접경 교동도 이산가족들 기다림

namsarang 2009. 12. 13. 22:28

[대림기획3]

북녘 땅 접경 교동도 이산가족들 기다림


지척이지만 아스라한 고향, 그 먹먹함 기도로 달래다...

▲ 교동도 지석리 망향대에서 교동공소 부회장 유득호 요셉 할아버지 등 어르신들이 펠리니(오른쪽에서 두 번째) 신부와 함께 고향에 대한 옛 추억과 이산의 아픔을 나누고 있다.

▲ 교동도 지석리 망향대엔 북녘에 두고 온 부모를 위한 제단이 설치돼 명절이나 한식 때면 이산가족들로 넘쳐난다. 사진은 이북 부모들을 위해 절을 드리는 교동공소 어르신들.


   지척이다. 6㎞ 남짓 떨어진 북녘 산하가 손에 닿을 듯하다. 황해도 연백군(현 황해남도 연안ㆍ배천군). 썰물 때면 헤엄쳐 건너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던 고향은 그러나 60년이 되도록 가지 못한다. 국경에 찬 바람이 매섭다.

 내년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꼭 60년. 북녘과 가장 가까운 강화 북쪽 섬 교동도를 찾았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이 섬엔 며칠 뒤 되돌아오겠다는 빈 약속만 남긴 채 60여 년 세월을 헤어져 살아온 이산가족이 숱하다. 실향민들의 기다림은 기약할 수 없기에 더 애달프다. 인천교구 강화 하점본당(주임 송형훈 신부)에 속한 교동공소 공동체와 함께 지석리 망향대를 둘러보며 그 오랜 기다림의 얘기를 들었다.



   늙은 아버지와의 약속

   #바로 눈앞 연백군 호남면 백석포가 고향인 정오현(마티아, 85) 할아버지.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집 방바닥에 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있었다. 그렇게 서너 달을 버티다가 거룻배를 타고 남쪽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는 교동도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게 없어 다들 풀뿌리를 캐먹다가 그마저도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내 송기죽을 끓여먹고 있었다. 인천으로 향했다. 어시장에서 일하던 중 우연찮게 미 3사단 군노무자로 들어간 게 인연이 돼 국군 1사단, 29사단에서 9년간 군생활을 했다.

 제대 뒤 정착한 곳이 교동도다. 헤어질 때 일흔여섯 살 고령이던 홀아버지(정우석씨)와 한 치라도 더 가까이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사흘만 기다리면 다시 오겠습니다"하고 늙은 아버지와 약속하고 떠나왔다. 그 헤어짐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는 평생 웃음을 잃고 살았다. 소리(노래) 한 번 해본 적도 없다. 고향에 두고 나왔던 아내(신정숙 모니카, 2007년 선종)를 피란지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짓고 고생고생하며 살았다. 그래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가 늘 그리워 눈만 내리면 한겨울에도 아내 묘소를 찾아 눈을 치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최근 웃음을 찾았다. 성당에 나오면서부터다. 매일 미사에 나와 동년배끼리 성가도 연습한다. 은퇴한 뒤 교동공소에 머무르는 로베르토 라파엘로 펠리니(한국이름 방인이,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 집전으로 매일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감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문득 고개를 들어 북녘 땅에 두고온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는 성순봉 할머니.

▲ 성순봉 유스티나 할머니의 눈물이 가슴을 저민다.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북녘 땅에 두고 온 부모를 그리는 모습이 애달프기만 하다.

   남편과 생이별 58년

 #올해 여든넷 성순봉(유스티나) 할머니는 '눈물부터 쏟았다'. 구월산 줄기가 쭉쭉 뻗다가 바다를 만나 뚝 끊긴 곳, 장산곶(長山串) 출신인 성 할머니는 1ㆍ4후퇴 직전 남편(김승언)과 생이별을 했다.

 공산당 입당을 거부하고 동네 뒷산에 숨어있던 남편과 시동생(김귀형 요셉, 2007년 선종)이 반동으로 몰려 잡혀가자 장산곶으로 피했다. 한겨울 바닷물이 빠지면 전투가 벌어져 총성이 울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피란민들도 전투 중에 20여 명이나 죽었다. 다섯 달을 그렇게 보내다가 시부모를 모시고 네 살배기 아들, 돌이 갓 지난 딸과 함께 월남했다. 26살 때였다. 17살에 혼인했으니 불과 9년만에 헤어졌다. 남편과 생이별 이후 군수송선을 타고 전남 해남까지 내려갔다가 2년 뒤 고향이 가까운 교동도에 정착했다. 원래는 고향 장산곶이 바라다보이는 백령도로 가려 했지만, 군부대 제지로 가지 못하고 교동도에 뿌리를 내렸다. 그때 시동생이 살아돌아온 것은 천행이었다.

 늙으신 시부모와 아이 둘을 데리고 살 길이 막막했다. 떡 장사에 옷장사, 고무신 장사 등 닥치는대로 일했다. 이제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은 끝났지만, 지나온 세월을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제 고향이 황해도 장연군 해안면 선교리인데, 이제 가기는 다 틀렸지요. 아들도 앞세워 하늘나라로 보냈으니 하느님 품에 안기는 것밖에 다른 소원이 없어요."

 '매일 기도를 드려도 못가는' 고향에 대한 할머니의 그리움은 애절하기만 하다.

▲ 교동도 선착장

▲ 지척이건만, 바닷길은 60년이 넘어도 가지 못하니 천리길보다 더 멀다.


   고향방문, 그 허전함

 #이뿐 아니다. 12살 때 월남한 고태근(요한, 70) 할아버지도 며칠 있으면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부모와 함께 교동도에 정착했다. 연백군 송봉면 운계리가 고향인 고씨는 전쟁 땐 북에서 학교가 폭격당해 이웃 사랑방에서 국어와 산수를 배웠다. 어렸을 적이어서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향에 가고 싶은 간절함은 다른 이산가족과 마찬가지다.

 개성시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 출신인 유득호(요셉, 79) 할아버지는 지난해 3월에야 평생 소원을 풀었다. 1ㆍ4후퇴 직전에 고향을 떠나온 지 58년 만에 개성을 찾은 것이다.

 "1박 2일 관광일정으로 고려역사관과 박연폭포 등지를 둘러봤는데, 고향은 공단이 들어앉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고향 방문이라는 소원을 풀기는 풀었지만, 허전하기가 이를 데 없었어요."

 요즘 교리공부에 한창인 예비신자 김순임(79) 할머니 고향도 교동도 발치인 연백군 해성면이다. 김 할머니도 인민군이 뒤에서 총을 쏘며 쫓아오는 가운데 쌀 두 말(16㎏)을 머리에 이고 등에는 젖먹이 딸(황춘자씨, 60)을 업고 서검도, 석모도를 거쳐 배를 타고 교동도로 도망쳤다. 뻘이 나오면 그 추운 겨울에 뻘에 쌀자루를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젖을 먹이던 기억을 떠올리면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망향시가 적힌 지석리 망향대 사이로 해무에 휩싸인 연백군 해성반도가 아스라하다. 교동 공동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모경을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60년 기다림을 가늠하기가 가능할까 싶다. 어찌 그 긴 세월 기나긴 고통을 삭였을까.

 이범옥(소사 체칠리아, 79) 할머니가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먼저 선종한 남편(김시환 아우구스티노)을 기려 지난해에 쓴 시 '격강천리라더니'가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격강천리라더니,/바라보고도 못가는 고향일세//한강은 임진강과 예성강을 만나/바다로 흘러드는데//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 가련만//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비 오듯 쏟아지는 포탄 속에 목숨을 부지하려/허둥지둥 나왔는데/부모형제 갈라져 반백 년이 왠 말인가?//함께 나온 고향친구들 뿔뿔히 흩어지고/백발이 돼 저 세상 간 사람 많은데/남은 사람 고향에 발 디딜 날 그 언제련가!"(전문)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