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교구 강화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 교수)
영국 바이런 시인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기적을 보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답니다.
"물이 사랑하는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히는 도다."
바이런은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을 시적으로 표현했지만, 그 표현에는 깊은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포도주는 혼인잔치에서 흔히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은 혼인의 가장 본질적인 사랑이 떨어진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걱정하는 성모님 마음에는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는 주인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하고 주님께 부탁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정말 뜻밖입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주님의 대답 속에는 부모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비인격적 의미가 담겨있는 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혈육의 관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이런 말씀을 항상 믿음 안에서 받아들입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성모님은 인간적 이해의 지평을 넘어서는 주님 뜻을 늘 마음속에 묻고 감싸 안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고양시키는 사랑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삶에서 가장 기쁜 날에 바로 이 사랑이 결여된 것입니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어쩌면 이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혼인을 통해 이뤄지는 가정에 이 사랑이 결핍될 수 있다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적 사랑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더 깊은 사랑의 차원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성모님은 바로 이 사랑을 부어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갈증은 주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기에 주님께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대답은 인간적인 사고를 한 차원 넘어서 그 사랑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 아닌가 묵상해 봅니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요한 2,7). 어떤 좋은 물도 돌로 된 물독이라는 제한된 틀에 고정돼 있으면 결국 썩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물을 그저 새 물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포도주가 주님의 거룩한 성혈로 변화되듯이 말입니다.
기쁨과 사랑에 흠뻑 취하게 하는 포도주는 주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주님이 현존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궁극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것은 바로 주님 사랑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부어줘야 합니다.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상징하는 이런 풍요로운 사랑을 누리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 영광의 때가 이르면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요한 2,10).
사랑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않고서는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주님 사랑을 깨닫지 못 할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힘은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해서 좌절할 때, 더 이상 변호하고 방어할 수도 없을 때, 스스로의 부족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때, 죄 없이 오해를 살 때, 거짓으로 욕을 먹고 그것을 해명하는데 더 이상 무력함을 느끼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의 시간, 침묵의 시간에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눈을 뜨게 하고,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빛 안에서 그 빛을 향해 걷는데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을 통해 더 좋은 포도주 맛처럼, 새로운 맛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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