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교구 강화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 교수)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 날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말씀대로 임금에게 드리는 봉헌물입니다.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6).
이 세 가지 봉헌물은 이방인들이 태양신에게 바치는 예물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참된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황금은 위대한 임금을, 유향은 위대한 신, 곧 하느님을 상징하며, 몰약은 죽은 이에게 바르는 약초로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 공현은 성탄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응답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어떤 것을 봉헌해야 합니까? 우리가 드려야 할 황금은 무엇입니까? 황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움켜쥐고 싶어 하고 그래서 얻기를 갈망하는 최고 가치입니다. 그래서 황금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고 세상을 통치하는 임금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임금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세상에서 임금처럼 사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죽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기에 아버지께서 뜻하신 모든 것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임금처럼 드높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사랑입니다. 우리는 황금이 아니라 이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사랑이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사람이 되신 순간부터 주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간 손에 의탁하고 그 처분에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가장 본질인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최고의 응답은 마음을 열고 같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 내적 양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유향은 무엇입니까? 유향 연기가 주님을 향해 피어오르듯, 간절한 우리 희망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욕구가 기도를 자극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떤 성과와 결과를 내놓고 자신의 신앙 정도를 판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갈망과 희망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의지를 보시는 것이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경직되고 어두운 우리 모습까지 모두 받아 주십니다. 그분은 이런 모든 사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주님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빛과 생명과 자유에로 이끌어 내시는 가장 소중한 우리 희망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됨됨이를 모두 품고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분과 깊은 내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몰약은 무엇입니까? 몰약은 우리 삶에 따라오는 상처와 고통을 가리키지만 또한 상처를 치유하는 약초입니다. 우리는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 우리 상처와 고통을 내어드림으로써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았고 고통 받으셨기에 그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어 보기도 합니다. 극심한 고통과 고독과 버림받은 상황 속에서 탄원해 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확신과 믿음 안에서, 상처와 고통으로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아기 예수님께 동방 박사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나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시는지, 나는 내 삶 속에서 어떤 선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변화되는 자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간 본래 모습을 찾고 그렇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 보이셨다면, 우리도 삶의 증거를 통해 주님을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최고 선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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