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연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포하신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이런 반응은 그들이 주님에게 원하는 바가 다름 아닌 기적과 같은 표징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차별화된 무엇인가를 보여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내면에는 자신만을 우선시하는 마음, 더 나아가 자신만을 위해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편협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구미에 당기는 바람들을 들어줄 수 있다면 믿어 보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나타나엘이 처음 주님에 관한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과도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반응은 나자렛 회당에서 주님께서 하신 첫 복음 선포 연설이 실패한 듯이 보이게 합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이었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 관한 주님 말씀은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을 극에 달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나서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 합니다. 주님의 공생활 시작과 같은 첫 데뷔 연설이 실패하고 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더욱이 주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첫 데뷔 연설을 시작하셨는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바를 주님께서 반드시 만족시켜주고 채워주셔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주님을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잘못된 바람과 기대는 자신의 생각 속에 주님을 설정하고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자신 감성에 맞는 하느님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유혹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실패를 무릅쓰고 복음 선포자가 진정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고 봅니다. 복음 선포자는 사람들의 무조건적 기대와 필요에 따라 주님을 끼워 맞추는 유혹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독한 유혹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 내면으로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방해물입니다. 외적 성공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한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7.19).
우리는 스스로 반드시 무엇인가 이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곤 합니다. 잘해야 한다는 욕망이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오로 사도께서 들려주신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마음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4-7).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입니다. 복음 선포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체험을 통해 주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립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때의 것들을 그만둡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은 결코 실패한 복음 선포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신앙 성숙을 위해 실패한 듯이 비춰질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외적으로 무엇을 이루거나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주님 자유와 사랑에 함께 동참하기를 더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