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미 군정의 '임명사령 제12호'에 따라 한반도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인 판·검사 전원이 모두 공식 면직됐고, 그 자리에는 전부 조선인 판·검사들이 임명됐다. 일제 식민지의 껍데기를 벗어내기 시작한, 한국 법치(法治)의 첫 걸음이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일제 강점하에서 실시됐던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나 조선변호사시험 등을 통해 법조계에 입문한 사람들이었다.대한민국의 자체 역량으로 판·검사와 변호사 등 법조인력을 배출해내는 고등고시 사법과 제1회 시험은 지금부터 61년 전인 1949년 11월에 치러졌다. 6·25전쟁과 4·19 혁명, 5·16 쿠데타 등의 격변 속에서 1963년까지 열여섯 차례 치러졌고, 1964년에 지금의 사법시험으로 이름을 바꿨다. 김도창 전 법제처장, 강우영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서정각 전 광주고검장 등 16명이 초기 판·검사로 활동하며 법조계의 기틀을 다진 고등고시 사법과 1기 출신들이다. 사법과 여성 최초 합격자는 1951년에 합격하여 여성 최초의 변호사가 되는 고(故) 이태영 박사이다.
- ▲ 고등고시 사법과 1기 필기 합격자 명단 19명을 보도한 조선일보 1950년 5월 3일자. 이중 16명이 최종 합격했다.
미 군정 기간 동안 일제 강점기 당시와 큰 차이 없이 유지되던 사법 체계는 조금씩 자립의 틀을 다져갔다. 지금은 용산참사 수사기록 공개와 강기갑 의원 판결 등을 두고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양쪽이지만, 본디 한 몸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하던 1948년 검찰청법 제정과 함께 법원 일부로 돼있던 검찰 조직이 독립한 것이다.
대법원·지방법원·서울고검·서울지검 등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관청들의 이름들도 대개 1948년에 등장해 거의 변함이 없었다. 당시 소속돼있던 판·검사들이 곧 대한민국 건국 후 첫 판·검사들인 셈이다.
1946년 7월 미 군정은 사법부장에 김병로를 임명했다. 김병로는 일제시대 조선변호사 시험을 통해 법조계에 입문한 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6·10만세 운동 관련자 무료 변론에 나서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김병로는 1948년 문을 연 대법원의 첫 수장(1948~1957)을 지내며 대한민국의 첫 사법부 수장이 됐다. 그는 퇴임 후 1964년 별세 전까지 정계(政界)에서 활동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추미애 민주당 의원 등 '판사 출신 정치인'의 최고참 격인 셈이다.
한편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 역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초 나란히 문을 열었다. 이 해 10월 31일 권승열 초대 검찰총장이 취임한 데 이어, 엿새 뒤에는 서상환 초대 서울고검장 및 최대교 초대 서울지검장이 취임했다. 대한민국의 첫 공식 검사장들의 라인업이 짜여진 것이다.
대한민국 초창기 검사들의 행보는 걸핏하면 '정치검찰' 이야기를 듣는 요즘과는 사뭇 달랐다. 1949년 최대교 서울지검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수사중단 지시를 거부하면서 독직(瀆職) 사건과 연루된 임영신 상공부 장관을 기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