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6·25]
특별취재팀
장일현 기자 ihjang@chosun.com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손진석 기자 aura@chosun.com
김형원 기자 won@chosun.com
양모듬 기자 modyssey@chosun.com
양승식 기자 yangsshik@chosun.com
"군수품 찾아오라" 명령에 열차 한대 몰고 적지로
김노한(84세·영주시 문수면)·참전유공자
③ 철도 기관사 김노한씨의 '철로 위 전쟁'
TNT 싣고 철교 폭파작전 불 붙이자마자 퇴각
뒤에서 천지 흔드는 굉음…
신호기 담당도 피란가, 열차 추돌사고
피가 강물처럼… 아수라장
"20㎞ 북쪽 죽령역에 있는 군수품 차량을 회수하라."
1950년 7월 26일
경북 영주군(현
영주시) 풍기역. 군 수송지휘부(RTO) 명령이 떨어졌다. 전쟁이 터지고 나서 철도기관사인 나는 밤낮으로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아군 방어선은 거듭 무너졌고, 중앙선 철도를 중심으로 치열한 격전이 계속돼 적은 이미 소백산 정상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기관차 한 대를 몰고 적지로 들어가라니…. 나이 스물넷.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 얼굴이 스쳐갔다. 그래도 기차는 달려야 했다. 가서 무기와 식량 등 군수품이 가득 실린 열차를 되찾아와야 했다. 우린 그렇게 철로 위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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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를 끊다7월 30일 밤 안동 옹천역. 지휘부에서 또 명령이 떨어졌다. "30분 이내에 공병대원 20명과 TNT 50상자를 싣고 출동하라." 깜짝 놀라 기관차에는 TNT를 실을 수 없다고 했다. 폭발할 수도 있다고 했다. 지휘관은 권총을 내 오른쪽 가슴에 꽉 누르며 "너 하나 때문에 전쟁이 망가져도 안 가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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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10월 경북 옹천역에서 국군 장병들이 무개(無蓋)화차에 빼곡히
- 타고 전선으로 향하는 모습. / 김노한씨 제공
옹천~평은 간 내성천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이었다. 북한군이 철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철교까지 가려면 2.75㎞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 속에선 기관차가 내뿜는 화염 온도가 500도 이상까지 올라간다. 불꽃이 TNT에 튀면 큰일이다. 이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
조심조심 서행 운전을 하며 터널을 빠져나왔다. 대원들이 TNT를 설치했다. 금방이라도 적들이 나타나 총을 쏴댈 것 같았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마자 급히 기관차를 몰았다. 7~8분이 지났을까. 뒤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들렸다. 다리는 폭파됐다. 그 통쾌함이란….
◆날마다 생지옥
10월. 무릉역에서 긴급 전달이 왔다. '열차 추돌사고 발생'. 안전장치도 없는 화차에 민방위 대원들을 잔뜩 태운 것이 원인이었다. 터널 밖 장내신호기 담당자가 피란 가고 없었던 것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무방비로 달리던 열차가 앞 열차를 들이받는 바람에 화차에 타고 있던 대원들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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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노한씨가 1950년 7월 5일 영주역에서 철도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 오른쪽 에서 세 번째 점선으로 표시된 사람이 김씨다. /김노한씨 제공
부랴부랴 현장에 도착했다. 곳곳에서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화차에 깔린 사람들은 "다리만 빼달라"고 아우성쳤다. 3시간 만에 기중기가 도착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숨진 뒤였다.
◆동료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1951년. 철도는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무너진 도로를 복구하러 떠나는 방위대를 실어 날랐고, 군인들 시신을 수습해 구덩이에 파묻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열차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기도 했다.
3월 31일 밤, '마의 터널'로 악명 높던 단양~죽령 간 터널을 지날 때였다. 열차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아예 정지해버렸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레일에 흘러 기관차 바퀴가 헛돌았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우린 많은 양의 유독가스를 마셨고, 6명 모두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관조사 이우용이 눈을 떴고, 가까스로 열차를 몰고 단양역까지 갔다. 우리는 미군 야전병원에 이송돼 응급 치료를 받았다. 그날 자정 기관조사 권인추가 숨을 거뒀다. "올해는 꼭 기관사 시험에 합격하겠다"던 후배다. 사랑하는 인추야…. 부디 저 세상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영면하기를.
김씨는 전쟁 직후 6·25 종군기장(從軍記章)을 받았다. 1971년 12월 퇴직한 뒤 현재 철도참전국가유공자회 영주지방회 회장을 맡고 있다.
1·4후퇴때 낳은 아들…피란 열차에서 젖 동냥으로 살렸는데…부산까지 가서 결국 급성 폐렴으로…
김은숙(81세·서울 영등포구)
저는 글을 잘 쓸 줄 모릅니다.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신문에서 '6·25 수기' 받는다는 걸 읽자마자 무조건 펜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떨려 진정이 안되네요.
1951년 1월 3일 새벽 둘째를 낳았습니다. 1·4후퇴 하루 전날이지요. 아들이었어요. 애 받으러 와 있던 친정어머니가 한 솥 가득 미역국을 끓여 주셨어요. 다음날 남편이 허겁지겁 들어와 "마지막 기차를 타야 한다"고 해요. 두살짜리 큰딸은 어머니가 둘러업고, 갓 태어난 아기는 남편이 안고서…. 길은 피란민들로 꽉 차 있더군요.
수원역은 북새통이었습니다. 간신히 열차 지붕에 올라탄 것만도 행운이었지요. 열차는 그 다음날 아침에야 출발했어요. 어느 정거장엔가 열차가 섰는데, 김밥 장수들이 나와 있었어요. 김밥 두 줄을 샀는데 익지 않은 쌀로 대충 말았는데도 어찌나 맛있었는지…. 가끔씩 총소리가 났어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또 누가 (지붕에서) 떨어졌나보다"고 수군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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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숙씨.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2박3일 걸려
대전역에 도착했습니다. 군인들이 "남자들을 더 태워야 하니까 여자들은 다 내리라"고 했어요. 무서워서 대들지도 못했습니다. 남편과 떨어져 아기 둘 데리고 무작정 사람들 따라 걸었습니다. 빈집 하나가 있었어요. 쌀통에 먹다 남은 쌀이 있기에 어머니가 밥을 지어 먹었더니 잠이 쏟아졌어요. 그동안 한번도 울지 않던 아이가 피란 떠난 지 나흘 만에 울었습니다. 며칠 후 집주인이 돌아왔어요. 어디로 가야 하나….
대전역에 가보니 기차가 서 있었습니다. 무작정 타려는데 안내원이 "안된다"고 막아요. 쭈뼛거리고 있으니까 어떤 남자분이 그냥 타라고 손짓해요. 용기 내어 올라탔어요. 후….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얼마 안 가 또 "다 내리라"는 거예요. 모두들 우왕좌왕하는데 열차가 또 왔어요. 줄을 서서 타려니까 이번엔 증명서를 보여달래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앞의 아주머니가 "5명 표가 있는데 나 혼자니까 이걸로 타세요" 하는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하늘이 저를 불쌍히 보았을까요. 죄를 많이 짓고 살았는데 이렇게 운이 좋으니 말입니다.
젖이 안 나와 아기가 계속 울어댔어요. 불쌍한 것. 세상에 나온 지 고작 일주일인데…. 객실을 돌아다니면서 젖 동냥을 했습니다. "젖 먹이는 분 있으면 조금만 먹여주세요. 우리 아기가 울어요." 여기저기서 젊은 여자들이 젖을 물려줬습니다.
드디어
부산. 열차는 초량이라는 곳에 멈춰 섰습니다. 어디로 가야 남편을 만나나. 퍼뜩 생각이 떠올랐어요. 남편이 공무원이니 경남도청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을 거야. 묻고 물어서 도청에 도착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문 앞에 고향 분이 앉아 있는 거예요. 그분이 지프차를 내줘서 그걸 타고 연락소에 가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제 행운은 거기까지였나 봅니다. 1·4후퇴 때 낳은 그 귀한 아들은 백일을 못 넘기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급성 폐렴이었지요. 주사 값이 너무 비싸 싼 걸 맞혔더니…. 어미 될 자격도 없는 몸이지요. 차가운 아기 시신을 포대기에 싸서 부산 어느 산에다 묻었습니다.
벌써 새벽 2시네요. 가슴 속 응어리를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영감도 재작년에 세상 떠나고, 저도 이제 갈 일만 남았습니다. 한 짐 덜고 가볍게 가겠습니다.
철로 따라 걷던 피란길… 기차 지붕에서 떨어져 숨진 시체들이 곳곳에
1951년 겨울 우리는 철길을 따라 걸었다. 도로는 군인이 차단했고, 철길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었다. 10살인 나는 부모님, 누나와 함께 한 달 전 평양을 출발했다. 대전을 지나 어느 역에선가 화물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피란민들은 앞다퉈 열차 지붕으로 올라갔다. 곧 열차가 떠날 것이란 기대를 안고서. 우리도 질세라 올라가 서로의 몸을 광목 천으로 동여맸다.
지붕 위에서 버티자니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손에 낀 금반지를 빼주며 "요깃거리를 사오라"고 했다. 플랫폼에서 소금과 통깨가 뿌려진 주먹밥 몇 덩이를 사서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하루가 넘게 기다려도 열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철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철로변에는 열차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시체들을 보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걸었다. 터널이 보였다. 아, 그때 본 참혹한 광경…. 터널 입구에 시체 열댓 구가 엉켜서 얼어붙어 있었다. 기차가 터널로 진입할 때 머리가 부딪힌 사람들이 떨어지면서 노끈으로 묶어놓은 식구들까지 줄줄이 떨어졌던 것 같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기찻길만 보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 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