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이용만 前재무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난 날'
학도병때 적 처치하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인민군이 이미 마을에…
가족 있던 방공호 피폭 아버지가 현장 파보니 어머니·동생 시신 나와
내 고향 강원도 평강군 평강읍은 해방과 함께 북한 땅이 됐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세상은 60년이 넘은 지금도 도망치는 꿈을 꾸게 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이 못살 데야, 못살 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결국 기회는 오지 않았다.- ▲ 이용만(77세) 전 재무부장관
1948년 평강고급중학교(지금의 고등학교) 시절. 학생들은 온 종일 평강역 군 공사현장에 동원됐다. 열차에서 전차 등이 바로 내릴 수 있도록 높이를 맞추는 공사였다. 여름엔 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도로를 까는 공사에 투입됐다. 탱크 두 대가 지나가도록 길을 넓히는 거라 했다.
이듬해 9월 김화고급중학교로 전학했다. 전 과목 만점으로 전교 1등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연히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 최우등생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중농(中農)의 아들이어서 성분이 나쁘다고 제외됐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38선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자며 50리(20㎞) 남쪽 김화로 이사를 했다.
전쟁이 났다. 고등학교 2학년생 전원은 인민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으라 했다. "남한에 친척이 많다"고 말해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찰떡
서울 수복 이후 국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해 왔다.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은 학생들이 학도대를 만들었다. 국군이 넘겨준 구식 소총과 60㎜ 박격포로 무장하니 의기양양했다. 어느 날 학도대원 30여명이 모여 북쪽 금성 방면으로 "공비를 토벌하러 가자"며 의기투합했다. 출동 도중 집에 잠깐 들렀는데 어머니가 "콩고물 찰떡이나 빨리 구워먹고 가라"고 하셨다. 부엌에 서서 몇개 먹고 떠났는데 그것이 어머니가 주신 마지막 음식이 되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 ▲ 1951년 초 미 2사단 38연대 유격중대 전우들과 찍은 사진. 사진 맨 오른쪽이 이 전 장관./이용만 전 장관 제공
옥수수밭에 있던 적 한명을 처치하고 저녁 때 집으로 돌아오는 데 인민군 패잔병들이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집을 불과 300m 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린 남쪽으로 향했다. 포천을 거쳐 서울에서 제2국민병 대열에 합류했다. 양평을 거쳐 여주·장호원·문경새재·상주를 지나 대구 밑 경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만 18세부터 35세만 군인이 되는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거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재빨리 '합격줄' 제일 앞으로 끼어들었다. 나이는 17살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꽤 키가 큰 편이서 무사 통과했다. 대구 훈련소에 입대한 나는 군번 '0180826'을 받았다. 이제 난 국군이다.
◆척추에 총알 박히다
훈련이 끝난 뒤 한국군 1개 중대가 강원도로 향했다. 회양여자중학교 자리에 도착하니 미군 육군 대령이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우린 미 2사단 38연대 직속 유격부대인 '록 레인저(Rock Ranger)' 중대가 됐다.
1951년 5월 11일 내가 죽은 날이고 또한 다시 태어난 날이다. 강원도 춘천지구 가리산에서 척후 활동을 벌이던 우리는 막 자리를 떠난 인민군을 뒤쫓았다.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내 몸에 휘감은 300여발의 실탄을 M-1 소총에 연방 갈아 끼우며 2시간 정도 싸웠을까. 총열이 과열돼 잠시 사격을 멈춘 사이 왼쪽 어깨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어깨와 척추에 두 발을 맞았다.
- ▲ 이 전 장관 척추에 박혀 있는 총알. 1994년 11월 미국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찍은 X-선 촬영 필름이다./이용만 전 장관 제공
"이렇게 죽는구나"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섭지도 않았다. 그대로 서서 동료들에게 "나는 죽었으니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 김창조 소대장이 달려와 "한방 맞고 뭘 그래. 난 여덟 발 맞고도 살았는데…"라며 나를 끌어내렸다.
그날 작전은 미군과 합동으로 벌였다. 내가 부상을 입자 미군 위생병 4명이 달려들었다. 나를 들것에 싣고 험난한 산길을 내려왔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들은 일주일 이상 세수도 안 한 것처럼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었다. 무거워 쩔쩔매며 내려오면서도 내 엉덩이에 페니실린 주사도 놔주고 물도 먹여줬다. 미군 야전병원에서 어깨 총알은 빼냈지만 척추의 한발은 제거하지 못했다.
그 총알은 아직도 내 몸속에 있다. 총알이 조금이라도 움직여 신경을 건드리는 날엔 아파서 며칠씩 누워 있기도 했다. 요즘도 신체검사 때면 사정을 모르는 의사들이 "뭐가 있는데…"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머니와 동생은 폭격으로 숨지고
부상으로 4개월 후 전역했다. 가족 소식이 궁금해졌다. 김화 사람들이 산다는 곳은 다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우리 앞집에서 질그릇·옹기 장사를 했던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날 들은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1950년 11월 어느 날 그날도 한 집에 한 명씩 노력 동원이 있었다. 형이 나가면 인민군에 끌려갈 수 있다며 아버지가 대신 집을 나섰고, 김화시내 옆 산에 굴 뚫는 작업장으로 가셨다. 그 사이 김화시내에 융단폭격이 있었다. 가족이 숨어 있던 방공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괭이로 폐허더미를 파헤치자 어머니 시체가 나왔고 이어 나보다 4살 어린 동생 시체가 나왔다. 더 파보니 척추가 부러진 형이 나왔단다. 형은 그 이후 꼽추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나." 내가 공비 토벌하러 간다고 집을 나선 이후 우리 가족들은 나를 기다리느라 피란도 가지 못했으리라. 이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죄는 하늘에서나 갚을 수 있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