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전쟁 부상 여파로 대부분 극빈생활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데…

namsarang 2010. 6. 12. 17:38

전쟁 부상 여파로 대부분 극빈생활 한국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데…

6·25 참전용사 테레다씨

"1952년 한국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지만 난생처음 '눈'이란 걸 봤어요. 어찌나 신기하던지…."

1952년 가을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은 테레다(Tereda)씨가 눈을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다.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지난 4일 오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빈민촌 케벨레(Kebele)5 지역에 사는 6·25 참전용사 테레다(Tereda·80)씨는 허름한 판잣집 침상에 누워 58년 전 한국의 겨울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의 움푹 파인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1952년 가을 일등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강원도 철원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었다. 뼈만 앙상한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에는 깊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테레다씨처럼 6·25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청년들은 6037명이다. 그 중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다. 6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참전용사와 가족들의 삶은 비참했다. 케벨레5 지역의 6·25전쟁 참전용사촌에는 생존용사 31명을 비롯해 참전용사 가족 1000여명이 살고 있다. 전쟁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참전용사들이 받는 연금은 월 180~200비르(약 1만8000원∼2만원)밖에 안된다. 연금도 못 받는 일부 참전용사 가족들은 양탄자를 만들어 팔아 버는 월 100비르(1만원) 정도로 생계를 잇고 있다. 집세와 전기료, 수도료를 내면 거의 남는 게 없다. 테레다씨도 "한때는 이웃들이 먹다 남긴 음식으로 연명했다"고 했다. 생활고를 못 이긴 아내는 10여년 전 집을 나갔고, 두 딸이 남의 집 가사 도우미를 하며 번 돈으로 집안 살림을 하고 있다. 테레다씨는 "6·25전쟁 참전으로 모든 걸 잃었지만 죽기 전에 한국에 가 그 하얀 눈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20명은 6·25 60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참전국 용사 초청행사를 통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참전 9개국 180여명의 용사들이 오는 22일부터 27일까지 한국을 방문해 판문점과 전쟁기념관 등을 둘러본다.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세레세(Serese·81)씨는 들뜬 목소리로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들었는데 부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피란민촌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한국계 병원(MCM·명성기독병원)이 에티오피아를 깨웠다

 

신식장비에 무료 수술… 자극받은 현지 병원들에 의료 서비스 경쟁 촉발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다음 목표는 의대 설립"

지난 5일 오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명성기독병원(Myungsung Christian Medical center·MCM) 화상 환자 병실에는 온몸이 흉한 상처로 가득한 9살 소녀 에테네시양이 누워 있었다. 1년 전 에테네시는 빵을 굽는 화덕 옆에서 놀다가 불이 몸으로 옮아붙었다. 치료를 위해 어머니 데벨레(29)씨가 집과 텃밭까지 다 팔았지만 손에 쥔 돈은 2500비르(약 25만원)뿐이었다. 1만비르가 넘는 수술비의 4분의 1밖에 안 됐다. 그는 온몸에 진물이 흐르는 딸을 업고 8개월 동안 병원 10여곳을 돌아다니며 임시 치료만 받았다. 소녀를 살린 건 에티오피아 최초의 한국 병원 MCM이었다. 지난 4월 MCM 병원장 아이나(55·노르웨이) 박사는 지인으로부터 에테네시양의 딱한 사정을 전해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 에테네시양은 "MCM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치료를 못받고 거리를 헤맸을 것"이라며 "커서 MCM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5일 오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명성기독병원(MCM) 화상환자 병실에서 아이나 MCM 병원장(사진 가운데)이 김철수 장로(오른쪽), 박시내 간호사(왼쪽)와 함께 에티오피아인 화상환자 에요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2004년 11월 아디스아바바에 세워진 한국 병원 MCM이 에티오피아를 바꾸고 있다. 의사 31명, 간호사 105명이 일하는 이 병원은 매달 6000여명의 현지 환자를 진료한다. 에테네시처럼 무료로 수술해주는 환자만 한 해 150명이 넘는다. 지난 2006년 12월에는 심장병으로 죽어가던 제메두(당시 7세)양을 한국으로 보내 판막 수술을 받도록 했다. 건강한 11세 소녀가 된 제메두양은 지난 1일 병원을 찾아 "MCM 선생님들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MCM은 그러나 자선 병원이 아니다. 극빈 환자만 수술비를 대주고 일반 환자에게는 철저하게 진료비를 받는다. MCM 아이나 병원장은 "우리 병원이 첨단 의료장비와 질 좋은 의료서비스로 환자를 유치하면서 이곳 병원들 사이에 선의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콜레라 환자 같은 심각한 환자를 보고도 본체만체했던 현지 간호사들은 이제 감기 환자만 봐도 앞다퉈 일어난다. 컴퓨터 단층촬영(Computed Tomography·CT) 기계 하나 없던 병원들이 환자 유치를 위해 앞다퉈 촬영기를 들여놨다. 현재 아디스아바바 시내 10여개 병원에는 총 8대의 촬영기가 가동되고 있다. 에티오피아 최대 병원인 국립 블랙라이언병원 바히루(49) 병원장은 "MCM이 잠들어 있던 에티오피아 병원들을 깨웠다"고 했다.

MCM은 지난 1993년 8월 선교를 위해 에티오피아로 건너간 명성교회 김삼환(65) 목사가 맨발에 해진 옷을 입고 다니는 빈민들에 충격받아 설립을 결심했다. 하지만 병원 세우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현지 정부는 50년간 병원 부지 임대료로 4500만비르(약 45억원)를 요구했다. 반년 동안 정부 관계자들을 쫓아다닌 끝에 부지를 무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1996년 시작된 신축공사는 IMF 사태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2년 동안 중단됐다. 김 목사는 "좌절하기도 했지만 '한 번만 더 해보자'는 오기로 덤볐다"고 했다.

드디어 2004년 11월 84개 병상을 갖춘 3층 병원이 문을 열었다. 기르마 월데기오르기스 대통령도 병원을 방문해 개원을 축하했다. 신식 장비에 치료까지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 수는 매년 늘었다. 개원 초 월 2000여명에 불과하던 외래 환자 수는 이제 월 6000여명에 이른다. 건강검진을 위해 노모를 모시고 MCM을 찾은 이욥(43)은 "다들 치료가 힘들다고 할 때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이 바로 MCM"이라고 했다.

MCM은 올해 또 다른 기적을 계획하고 있다. 의사를 양성하는 의과대학을 세우는 일이다. 환자 수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의사 수도 메울 수 있다. 에티오피아 타데세(59) 상공부 장관은 "MCM 의과대학이 설립되면 실력 있는 전문의들이 양성돼 제대로 된 의료 인프라가 구축될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의과대학 건립은 6·25 때 우리를 도운 에티오피아를 위해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