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납북자 가족' 탈북 이후 최초 증언
남쪽 출신 아버지는 7남매 낳고도 고향 생각
생년월일 문신 새겨놓고 부모님 곁 묻히길 희망
"죽으면 부모님 곁에 가서 눕고 싶다.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어. 통일이 안 돼 북에서 죽게 되면, 제일 높은 산꼭대기에 묻어다오."지난 1950년 10월 3일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서 패주하던 북한 인민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던 당시 18세의 청년 장현수(가명)씨는 끝내 부모님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작년 3월 북한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5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장씨의 딸 귀화(가명·50)씨는 "북한에서 살 때는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는데, 여기 와보니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아버지 장씨는 고향이 그립다는 말도 마음대로 못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 5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탈북자 장씨가 사무실 한쪽의 납북자들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장씨의 아버지는 6·25 당시 납북된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작년 3월 북한 땅에서 생을 마쳤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아버지 장씨는 납북된 뒤 왼팔뚝에 '1932년 ○월 ○일'이란 문신을 새겼다. 생일을 문신으로 남겨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딸 귀화씨는 아버지 장씨의 출신성분 문제로 이혼당하고 함경북도 무산의 친정집에 돌아온 1980년대 중반, 처음으로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게 된 사정을 들었다.
"인민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젊은 사람들을 끌어냈지. 총구로 밀어 하루 종일 걷게 하더니 저녁 무렵 어느 산골짜기에서 인민군복과 총을 나눠주더라. 총이 내 키만 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돌아가야 한다니까 인민군이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조국을 지켜야지'라고 하더라. 1~2년이면 고향 갈 줄 알았다."
정부가 발간한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에 따르면 1950년 10월 3일 장씨가 살았던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선 20~35세(1952년 작성 당시)의 청년 29명이 동시에 납북됐다. 9·28 수복으로 서울은 인민군이 이미 패주한 뒤였지만, 강화도는 여전히 인민군 치하였다. 북한군에 끌려간 장씨는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왼쪽 하반신에 동상을 입어 평생을 다리를 절며 살았다.
장씨는 함북 무산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하며, 국군포로 4명의 가족과 이웃해 살았다. 보위부원이 근처에 살며 이들끼리 서로 감시하도록 했다. 지형이 험준한 무산에는 철도 사고가 많았다. 북한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철로에 큰 바윗덩어리를 갖다놓아 기차가 전복되곤 했다. 그때마다 남에서 온 장씨와 장씨의 아들은 보위부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했다. 맏딸인 귀화씨를 비롯한 7남매는 아버지 장씨 때문에 차별과 냉대 속에 살았다. 자식들은 "뭐하러 이렇게 많이 낳아서 생고생시키느냐. 차라리 아버지 혼자 어딘가로 조용히 사라지라"고 아버지를 원망하기 일쑤였다.
줄담배를 피우던 장씨는 기관지가 나빠져 철도 일을 그만두고 집안에 송장처럼 눕게 됐지만, 보위부원이 이틀에 한 번꼴로 집에 찾아와 장씨에게 그간의 행적을 적어내라며 A4용지만 한 종이 3장을 내밀었다.
장씨는 술 한 잔 걸치면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귀화씨는 "인근에서 살던 국군포로 3분이 차례로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장례식에 안 가고 방에서 혼자 울고 계셨다"고 했다.
평생 고향을 그리던 장씨는 귀화씨가 한국에 들어온 뒤 "아버지 고향에 다녀왔다"고 알리자, 그때부터 아무 말도 못하고 가슴을 두드리며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헛손질을 하다 보름여 만에 끝내 숨졌다. 작년 3월이었다.
귀화씨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고향에 가거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찾아서 나 대신 술이라도 한 잔 올려라'고 말씀했는데 아직까지 산소도 못 찾았다"면서 "아버지 소원을 언제나 풀어 드릴 수 있을지 막막하다"며 눈물을 훔쳤다.